한 나라의 정신문명을 파악하려면 국립도서관에 가는 게 가장 효율적이다. 장서의 양과 질에서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지식인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지름길은 그의 서재를 방문하는 것이다. 국가 최고지도자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의 서재가 뿜어내는 교양과 지식의 향기가 비전과 리더십의 품격을 결정한다.

조선조에서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치적을 일궜던 호학군주 정조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그는 즉위한 다음 날인 1776년 3월 11일, 창덕궁 후원에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 건립을 하명한다. 전란과 실정으로 피폐해진 나라와 민생을 구하려면 학술 진흥이 시급하다는 판단에서다. 필요한 책이 있다면 어디든 사람을 보내 사들였다. 중국에서 구입한 1만 권짜리 백과사전 '고금도서집성'이 그 하나다.

정조의 책 사랑은 '홍재(弘齋)'라는 아호에서도 드러난다. '세상에서 제일 큰 서재'라는 뜻이다. '선비는 도량이 넓고(弘) 의지가 굳세지 않으면 안 되나니,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기 때문이다'는 논어 문장에서 따왔다. 서적 수집과 함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우수한 인재를 뽑아 학문 연구를 독려한 끝에 그는 문예부흥 시대를 열었다. 그 결과물의 일부가 184권 100책으로 편집된 자신의 시문집 '홍재전서'다. 현재 서울대에 남아 있는 규장각 고도서와 고문서는 각각 17만5000여 권과 5만여 점에 달한다.

현대 우리나라 최고지도자 중 대표적인 장서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3만여 권의 장서를 보유했던 그의 독서 스타일은 다방면에 걸친 다독형인 동시에 정독형이었다. 서재에 꽂힌 대부분의 책마다 문장 곳곳에 밑줄이 그어져 있고, 책장 여백에 메모가 적혀 있는 게 그걸 말해준다. 타계하기 전 병원에 갈 때까지 '조선왕조실록' '제국의 미래' 등을 읽었다고 한다.

대통령의 서재도 진화한다. 그제 '국민이 만드는 대통령의 서재'가 탄생했다. 온라인 홈페이지 '광화문 1번가'를 개설하면서 공식 출범한 '국민인수위원회'의 한 프로그램이다. 대통령과 함께 읽고 싶은 책을 추천받는 게 활동 내용이다. 국민인수위는 앞으로 100일간 국민들로부터 정책 제안을 받는다. 제2의 '촛불광장'인 셈이다. 국민인수위 프로그램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국민이 만드는 대통령의 서재'다. 세상에 아무리 큰 도서관인들 국민이 만드는 대통령의 서재만 할까. 대통령 개인이 아닌 국민의 서재인 까닭이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