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함부르크에서 개최되었던 지난 G20 정상회의는 정상들의 면모나 공식 의제보다 회담장 밖의 폭력시위로 인해 국제적 화제가 되었다. “지옥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는 도발적인 피켓이 무색하지 않게도 시위대의 일부는 복면을 착용하고 폭력을 휘둘렀으며 심지어 웃통을 벗고 이두박근을 자랑하며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자들도 있었다. 경찰도 폭력적으로 시위를 진압했는데, 그 과정이 가히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극렬했다.

이러한 꺼림칙한 광경과는 대조적으로 현지에서 전례 없는 대접을 받고 해외 정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우리 대통령의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았다. 지난겨울 마치 축제와 같이 흥겹고 평화롭던 우리의 촛불시위 광경이 오버랩되면서 왠지 어깨가 으쓱해진 것은 나만의 느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과연 함부르크의 폭력시위가 반드시 나빴다고 보아야 할까? 우리의 평화시위는 반드시 옳았는가? 지난겨울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비폭력주의 노선이 아주 올바른 정치적 결정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무조건 비폭력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비폭력 노선이 정치적으로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옳았던 것이다. 비폭력 평화시위는 그간 일부의 폭력시위가 보수정권에 의해 악용되었던 뼈아픈 경험에서 비롯된 학습효과였다. 함부르크에서의 폭력시위도 고유의 정치적 맥락에 따라 평가해야 옳다.

시위대가 부르짖은 것은 한마디로 “자본주의 끝장내자”라는 요구였다.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는 현 체제 내에서 더는 타협은 없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빈곤국이나 전쟁에 시달리는 나라가 아닌, 서유럽에서도 가장 부유한 상업도시에서 울려 나온 함성이었다.

물론 이 사태를 불순한 외부세력의 개입이라고 폄하하면 판단이 쉬워진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안정된 곳인 서유럽이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극우와 극좌 사이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행보는 유럽의 현주소를 알려준다. 그가 표방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진화이기커녕 그 이념적 수명이 다했음을 나타내는 지표일 뿐이다. 이미 오래전에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자유주의 이념에 내재한 근본적 모순을 지적한 바 있다. 세계적 냉전의 기운이 짙어가던 1947년에 출간한 저서 ‘휴머니즘과 폭력’에서 그는 자유주의가 그 자신에 반대할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한에서만 자유를 보장한다고 비판했다. 자유주의는 사회 변혁에 대한 요구를 억누르기 위해 형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데, 이는 거리의 폭력과는 다르지만, 오히려 훨씬 더 교묘하게, 제도화된 형태로 자행되는 폭력이다.

중요한 것은 폭력의 유무가 아니라 정당성이다. 신체를 가진 존재로 태어난 인간에게 폭력은 숙명과도 같으며 자유주의 체제는 공산주의 체제만큼이나 폭력에 의존하고 있다. 친미 반공주의를 거부했지만, 그렇다고 소련식 공산주의도 지지하지 않았던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비폭력주의를 자유주의의 사법적 환상이라고 일갈했다.

우리도 이러한 환상에 빠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공권력이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폴리스라인을 넘어서기라도 하면 곧바로 범법자라도 되는 듯 움츠러드는 우리들은 흡사 폭력을 추방하는 듯 가장하는 법의 은근한 폭력에 길든 것은 아닌가? 우리는 전 인류사의 성과물인 민주주의 원리를 대화와 타협이라는 답답한 공식으로 축소한 것은 아닐까? 왜 폴리스라인을 넘어 대안적 사회를 부르짖는 것은 폭력이고 법의 이름으로 이러한 요구를 짓밟는 것은 비폭력인가?

폭력은 억누르거나 숨긴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슬림 테러리스트들의 진화가 이를 입증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유명한 ‘폭력론’(1970)에서 폭력이 인류역사의 출발과 함께해온 인간 본연의 정치적 행위에 속한다고 말했다. 폭력은 인간이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게 하는 유용한 힘이다. 아렌트는 폭력이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성격을 띤다는 점을 인정하기에 오로지 특정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으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폭력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지만, 그 자체로는 목적이 될 수 없다.

폭력과 마찬가지로 비폭력도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대의이다. 지긋지긋한 박근혜 시대를 종식시킨 우리는 근본적인 변화를 원한다. 우리는 상식적이고 공정한 법 집행을 원하지만, 동시에 실정법의 제약을 과감히 뛰어넘어 진정으로 공정한 세상을 만들기 원한다. 우리 자신과 공동체의 미래를 설계할 공평한 기회가 보장되지 않는 현재와 같은 세상은 텅 빈 이름의 자유민주주의보다는 지옥의 문턱에 가깝기 때문이다.

부산교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