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 갔다. 대기표를 받고 기다리는 중 소리가 높아지는 곳으로 자연히 눈이 간다. “지점장 나오라고 해.” “내가 여기 얼마나 예금을 많이 하고 있는데 이 정도도 못 해줘.” 이런 고성이 들린다. 앞에 있는 여직원은 쩔쩔매며 어쩔 줄을 모른다. 뒤에 있는 조금 더 직급이 높은 여직원이 오고 남자직원도 왔지만 한 번 시작된 분노의 표출은 그치지 않는다. 뉴스에서나 보던 갑질의 횡포다. 낯설지 않다.

자영업자 비중이 우리나라만큼 높은 곳도 없다고 한다. 자영업의 비율이 OECD 국가 중 4·5위를 달린다고 하고, 자영업자가 그렇게 많다는 일본의 2배가 넘는다고 하니 우리나라는 자영업이 주요 산업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자영업은 대부분 서비스를 바탕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다 보면 감정적 상처와 고통에 쉽게 노출된다. 언론을 통해 우리가 보는 부분은 아주 일부다. 매일 마음의 고통을 외면하고 심지어 웃어야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앞서 언급한 은행에서의 상황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은행 직원이라는 이유로 고객의 분노표출을 감당해야만 하는 그 순간, 그 분노의 에너지는 고객한테서 나왔지만 다시 은행 직원의 내면에 그대로 쌓일 것이다. 그 에너지가 주변 가족들에게, 혹은 남편이나 남자 친구에게 짜증이라는 형태로 배출될지도 모른다. 이런 형태로 감정의 에너지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모양만 달리한 채 옮겨지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사회 구성원 사이에서 분노와 화의 에너지가 옮겨지면서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니 감정의 총량도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물리학에서 질량 보존의 법칙이 있듯이 ‘감정 총량 보존의 법칙’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까지 이어진다.

나의 화를 풀기 위해서 나의 앞에 있는 상대방 혹은 주변 사람, 가족들에게 분노를 쏟아내면 그 분노는 억울(抑鬱)의 형태로 각자의 마음속에 저장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억울의 형태로 저장된 에너지는 점점 더 힘이 세어진다. 그리고 더 큰 분노로 변해간다. 분노의 에너지가 너무 커지거나, 혹은 분노를 표출할 만한 계기를 만나게 되면 그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온다. 사회 불만을 표현하기 위해 묻지마 범죄를 일으키는 경우도 이런 사소한 분노와 억울함이 쌓이고 쌓여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우리 모두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감정 총량 보존의 법칙’을 생각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 내 앞에 있는 타인에게 조금 더 친절하고, 조금 더 배려하며, 조금 더 화를 내지 않고 대하는 것이 결국에는 우리 모두를 위하는 일이 된다.

인도와 네팔 등지에서 사용되는 인사말 ‘나마스테’는 ‘나는 당신 안의 신(神)에게 절합니다. 나는 신이 당신에게 주신 재능에 경의를 표합니다’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참 멋진 인사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육체와 영혼이 있고 그 영혼에는 신이 깃들어 있다. 그만큼 한 명 한 명이 귀한 존재라는 뜻이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안다. 한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정성과 사랑이 들어가는지.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존재다. 부모에게 소중한 아들, 딸이고, 어느 한 사람의 사랑하는 배우자이며, 누군가의 든든한 아빠 엄마다. 기분이 나쁘다고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다. 누구나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듯이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가의 귀하디귀한 존재라는 생각을 놓치지 않고 살면 좋겠다.

서로서로 귀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고 산다면 갑질의 횡포도, 억울한 감정 노동도, 분노의 발산도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지금보다 감정적으로 안전한 사회가 될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소중한 존재다. 나도 당신도. 나마스테!

공감한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