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늦은 가을바람이 차갑다. 가지에 힘겹게 매달렸던 나뭇잎이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뒹군다. 낙엽은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 왔다가 저리 갔다 하며 겨울이 우리 곁에 가까워졌음을 알린다. 이따금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는 낙엽을 쓸기라도 하듯 모았다 바람을 일으켜 흩어놓기를 반복한다.
자연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어릴 때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위뜸 중뜸 아래뜸으로 나뉜 작은 마을이 내 고향이다. 겨우 30여 가구의 집은 모두 산을 등지고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느 시골처럼 냇물이 마을 앞으로 흘렀다. 여름철 장마엔 제법 큰 물줄기가 만들어졌다. 비가 그치고 하루 이틀이 지나면 무섭게 흐르던 냇물은 동네 아이들 놀이터로 변했다. 한 집에 아이가 4, 5명 정도 되었으니 나이가 같은 또래가 제법 많았다.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것은 가을 운동회다. 초등학교 첫해 다닌 학교는 분교였다. 운동회는 고개 둘을 넘어 한 시간 반 이상이 걸리는 면사무소 소재지의 본교에서 열렸다. 처음 보는 만국기와 커다란 스피커에서 우렁차게 흘러나오던 애국가·체조 구령에 어리둥절했다.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모인 것도 처음 보았다. 그날은 온통 처음 겪는 일뿐이었다.

두메산골 소년은 새로운 경험을 하고 해가 질 무렵 집으로 왔다. 다음 해부터는 다행히 고개를 넘지 않아도 됐다. 내가 다니던 학교가 정식인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한 학년에 한 학급으로 이루어진 작은 학교였지만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이면 300명이 훌쩍 넘었다. 조그마한 시골에 이렇게 많은 학생이 있었던 것은 우리가 베이비부머 세대였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어느 날. 담임선생님은 우리를 운동장으로 모이게 하고 달리기 경주를 시켰다. 남자 아이 28명과 여자 26명에 불과했으니 시합을 해봤자 뻔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연히 4명을 선발하는 달리기 선수에 운 좋게 내가 포함됐다.

다음 날부터 선생님은 수업이 끝난 뒤 이틀 동안 연습을 시켰다. 산이 많은 시골에 가을 햇살은 오랫동안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해가 지고 금세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몸은 많이 지쳐 있었고 허기지고 다리도 아파 걷기도 쉽지 않았다.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는 마을 진입로 서낭당을 지날 생각에 걱정도 태산이었다.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 때문에 한낮에도 혼자 지나기 무서웠다.

결전의 날 다리에 알이 배겨 겨우 등교했다. 담임선생님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새로운 경험을 했던 면사무소 소재지 학교로 나를 포함해 4명을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400계주와 100m 달리기 경주를 했다.

면사무소 소재지 아이들은 우리를 아주 촌놈 취급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검정 고무신을 신은 우리와 달리 그들은 흰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허벅지와 종아리에 배긴 알 때문에 어기적거리며 걷는 모습이 그들 눈엔 촌뜨기 그 자체였을 것이다.

결국 군 대회에 나갈 면 대표 선발전에서 우리는 보기 좋게 패하고 말았다. 적어도 한두 주 이상 시간을 갖고 훈련했거나 차라리 연습을 하지 않고 겨뤘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텐데 짧은 시간의 연습이 독이 된 셈이었다.

그 많던 학생은 지금은 추억이 돼 간 데 없다. 문을 닫았던 학교마저 몇 해 전 사라졌다. 높게만 보였던 앞산은 작은 동산으로, 멀게만 느껴졌던 내 집이 산자락 밑이란 걸 알기까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인제대 스포츠케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