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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 칼럼] 오래 남아 있는 기억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7-12-28 19:03:19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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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반공교육 세례를 상당 기간 받고 자란 세대여서라고 해두자. 그게 과연 잘못된 교육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이지 않은 사회적 사건으로 가장 오래된 기억은 ‘1·21사태’다.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124군부대 소속 무장군인들이 우리 대통령의 ‘목을 따기’ 위해 청와대 바로 뒤 자하문까지 이르렀다가 검문소에서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의 검문으로 저지되어 총격전을 벌이며 도주하다 대부분 사살된 사건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1968년의 일로 북한군은 31명이었고, 그중 29명이 사살되고 김신조 씨는 생포되었으며 1명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았다. 우리도 군 장병 25명과 민간인 7명이 사망하고 59명이 부상한 엄청난 피의 참사였다.

다음은 울진·삼척 무장공비침투사건으로 이승복 어린이가 ‘입이 찢어져’ 사망한 기억이다. 역시 인터넷 검색에 따르면 1968년 10월 30일부터 3차에 걸쳐 120명의 무장공비가 침투해 12월 말경까지 벌어진 사건이다. 토벌작전으로 공비 111명이 사살되고 7명은 생포 또는 자수했다. 우리 측은 군경·예비군 33명이 전사하고 민간인 16명이 피살되었다.

이듬해인 1969년 12월 11일에 일어난 대한항공기 납북사건도 기억이 또렷하다. 승객과 승무원 51명 중 12명은 현재까지 송환은 물론 생사도 알려주지 않고 있다.

모두 어린 초등학교 때이고 현장에 살지 않았음에도 여태 기억이 생생한 것을 보면 반공교육의 세례 때문만은 아니고 충격이 컸던 것이 분명하다.

1976년 8월 18일의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은 고등학교 때의 일이고, 1983년 10월 9일의 미얀마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과 1987년 11월 29일의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은 공무원 시절의 일이니 또한 기억이 분명하다.

1996년 9월 18일 좌초된 북한 잠수함 발견으로 비롯된 강릉 무장공비 사건도 기억에 남아 있고, 1999년 6월 15일과 2002년 6월 29일 월드컵 기간에 벌어진 제1·2연평해전, 2010년 3월 26일의 천안함 폭침사건과 그해 11월 23일의 연평도 포격사건은 현재진행형인 것처럼 여겨진다.

기억을 더듬으면 북한의 대남도발은 훨씬 더 많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악랄 무도한 그들의 근성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 복무 중이던 1979년 가을, 강원도 화천 인근으로 침투한 무장공비를 소탕하는 작전에서 몇 주간 겪었던 찬바람 속 야간매복과 긴장은 지금도 끔찍하다. 물론 반대의 기억도 있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과 뒤이은 적십자회담을 시작으로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이런저런 남북 간 합의들. 그때마다 정권은 평화의 애드벌룬을 띄웠지만 끔찍한 기억 때문인지 별반 믿기지 않았고 역시나 도발은 멈추지 않았다.

도발, 합의, 또 도발, 또 합의…. 피에 대한 제대로 된 보복의 본때 한번 보여주지 못한 채 백지장이 되기 일쑤인 합의만 이어지는 동안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무려 120여 명의 무장공비가 침투해 무고한 민간인까지 학살한 만행은 언제부터인가 어린 소년의 죽음을 두고 입이 찢어졌느냐, 아니냐의 공방으로 비화되어 도발이라는 본질은 뿌옇게 흐려졌다, 세상에! 중동 근로자의 그리운 귀국길을 공중에서 날려버린 민간항공기 폭파사건은 세계가 모두 인정하는 폭파범의 진위논란으로 테러라는 진실을 호도하더니, 우리의 친구와 자식이 차디찬 바다에 가라앉은 천안함 폭침사건에서는 아예 대놓고 갖은 괴설을 내놓으며 북한을 편들기까지 했고 현재도 진행형이다. 정말이지, ‘이게 나라냐!’는 통한은 거기에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제 북한은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되었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미국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마 조만간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도 실전 배치해 우리의 목을 위협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 2월, 신경 독성물질을 이용한 김정남 암살에 이어 탄저균 미사일 탑재실험 보도도 나온다. 어쩌면 지금 북한은 핵과 미사일로 미국의 발목을 묶고 대한민국의 경제적 과실을 날로 삼키기 위한 세균전을 획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실로 절체절명의 위기라 아니할 수 없는 현실이다.

평창동계올림픽이 위기를 평화로 돌려놓을 것처럼 또 애드벌룬을 띄우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북한의 도발 행태로 보아서는 떡 내놓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이나 마시는 격이기 십상이다.

수없이 맞아 피 흘리고도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한 상대의 평화 제안은 깡패에게는 구걸로나 보일 뿐이다. 동맹과 우방에 결을 달리하며 신뢰를 잃는 어리석음은 적의 야욕을 더욱 불태우게 할 것이다. 국가 간에 있을 수 없는 횡포를 자행하는, 그것도 언제든 적의 편이 될 수 있는 나라에 결기는커녕 정당한 항의조차 하지 못하고 머리 조아리는 남우세스러운 외교는 만만함이나 살 뿐이다.

힘이 뒷받침되는 평화의 길을 찾아야 한다. 전술핵을 들여와 군축협상에 나서거나 자체적 핵 개발 선언이라도 해야 한다. 핵 동결 같은 어정쩡한 자세는 애초 내보이지 말아야 한다. 포기하지 않으면 동맹과 우방의 결의로 제거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야 한다. 평화의 제전 평창동계올림픽은 그런 평화 의지의 무대가 될 수도 있다. 우리 땅이니 우리의 허락 없는 동맹의 무력사용은 불가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의지가 아니라 몽니에 그칠 수 있는 절박한 사정임을 동계 찬바람에 깨우쳐야 한다.

내일 신문이 나오면 이제 2018년 판 신문을 보게 된다. 2017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낯부끄럽고, 정신 사납고, 해괴하다 못해 절망하게 되던 흉한 일들은 하루빨리 잊는 것이 좋기는 하다. 그래서 ‘새롭게’ ‘다시’ 시작하라는 ‘새해’도 있는 것일 테고. 그러나 망각도 유용하지만 우린 너무 쉽게 잊기에 환상에 젖고 본질의 왜곡에도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아 오래 남아 있는 기억들을 꺼내봤다. 내년에는 희망과 사랑의 글만 쓸 수 있기를 바라며 독자 여러분의 평안과 웃음을 기원한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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