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테이너 2만 개를 실은 선박들이 오가는 항만에 거대한 로봇들이 등장했다. 키 125ｍ, 팔 다리 100ｍ 안팎. 거대한 전자동 크레인들이다. 이 ‘크레인로봇’들은 선박이 접안하기 무섭게 그 긴 팔을 ‘철커덩’ 내리더니 컨테이너들을 집어서 터미널 내 야적장의 정해진 구역에 쌓거나 부두의 무인 트레일러에 싣는다. 1시간에 40개씩. 사람이 크레인을 조종할 때 보다 작업 속도가 30% 이상 빠르다. 터미널 운영사 사장은 “인건비까지 아끼게 됐다”며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그때까지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로봇들을 응시하던 수백 명의 눈빛이 비로소 변한다. 이들 항만 근로자는 “저 기계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길 수 없다”며 즉각 행동에 들어갔다. ‘로봇과의 전쟁’ 선포. 즉, 파업에 돌입한 것이다.
어떤가? 이 이야기는 공상과학(SF) 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한 장면이 아니다. 2015년 새해를 불과 며칠 앞두고 네덜란드 로테르담항에서 벌어졌던 실제 상황이다. 먼 미래에나 일어날 법한 영화 같은 이야기가 이미 현실에서 벌어진 것이다.
로테르담항은 2016년 기준 컨테이너 1238만 TEU(길이 6ｍ짜리 컨테이너 1개 단위)를 처리한 유럽 최대 항만이자 세계 9위 항만이다. 상업과 무역으로 세계를 제패했던 네덜란드의 대표 항만답게 로테르담항은 항만 운영 시스템 분야 선도 항만으로 유명하다. 크레인로봇으로 대변되는 무인 자동 항만시스템이 이미 3년 전 이곳에서 운용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전 세계 항만에도 속속 도입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완전 무인화의 배경에는 글로벌 경쟁 격화와 컨테이너선 대형화, 인공지능(AI) 등 4차 산업혁명 영향 등이 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항만 인력의 실직이라는 치명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항만의 완전 무인 자동화는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2015년 1월 로테르담항의 APM 마스블락트2 1단계 터미널이 본격 운영에 들어간 이후 2016년부터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롱비치항이 무인 자동화 항만으로 탈바꿈했다. 이들 항만은 크레인과 야드 트랙터 등 컨테이너를 선박에 싣고 내리고 운반하는 모든 작업을 사람 없이 기계 스스로 수행하기 때문에 ‘로보틱 항만’이라고 부른다. 독일 함부르크항은 2025년까지 완전 무인화 스마트 항만으로 탈바꿈할 계획이다. 아시아권도 예외가 아니다. 중국 칭다오항이 지난해 5월 아시아 최초로 완전 무인 자동화 터미널(QQCTN)을 개장한 데 이어 세계 1위 상하이항이 새해부터 무인 완전 자동화 터미널 운영에 들어갔다. 2016년 4월 중국 교통운수부가 발표한 ‘교통운수정보화 13.5 발전계획’에 따른 변화다. 또 세계 최대 환적항인 싱가포르항은 새로 개장하는 65개 선석 규모의 신항 TUAS를 완전 무인화하기로 했다.
각 항만 당국이나 터미널운영사가 완전 무인 자동화에 박차를 가하는 이유는 기존 터미널보다 인건비와 동력비 등 운영비를 37% 이상 절감할 수 있고, 생산성을 40% 정도 향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반자동화 수준인 부산항이라고 완전 무인 자동화 시스템 도입을 외면할 수는 없다. 정부의 ‘부산항 메가포트 육성전략’에 따라 2021년, 2022년에 개장할 신항의 2-4단계 민자부두(3개 선석)와 서컨테이너부두(5개 선석)는 자동화 수준이 한층 높아질 수밖에 없다. 부산항은 1978년 허치슨 터미널 개장 이후 처음으로 지난해 컨테이너 2000만 TEU시대를 열었다. 지난달 26일 부산 신항에서 열린 축하행사에는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과 서병수 부산시장 등이 참석해 경쟁적으로 ‘장밋빛 청사진’을 그렸다. 하지만 ‘2000만 TEU시대’의 당면 과제인 무인 자동화와 그에 따른 일자리 소멸 문제는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자료에 따르면 항만 자동화로 기존 인력 80%가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경고음이 울리고 있지만, 항만 인력 고용 문제는 당국으로부터는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했던가. 7900여 항만 근로자의 결사체인 부산항운노조가 최근 한국항만운송노동연구원에 용역을 의뢰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하지만 근로자 재교육 시설 마련, 고용 안정화 기금 조성 등 시급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노측의 노력만으로는 해결 난망이다. 정부, 부산항만공사, 터미널 운용사 등 사용자와 당국이 노측과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한다. 때를 놓쳤다가는 자칫 로테르담항 파업과 같은 사태가 재연될까 우려된다. 노조 출범 이후 무파업 원칙을 지켜온 부산항 근로자들이지만, 생존을 위해서라면 파업이라도 불사할 태세다. 부산항이 멈추면 하루 1조 원씩의 피해가 발생한다고 한다. 부산항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를 걷어내는 일, 노사정이 함께 서두를 일이다.
논설위원 bungse@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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