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마지막 주 화요일 저녁, 부산 민주시민교육원 ‘나락한알’에서는 ‘화산도’ 읽기 모임이 열린다. ‘화산도’는 재일 조선인 작가 김석범 선생이 쓴 장편 대하소설이다. 1997년 10월 완결된 이 작품은 우여곡절을 거쳐 2015년 전문이 번역돼 출판되었다. 1988년 1부가 번역되어 출간되기도 했으나 완성된 작품이 독자들에게 알려진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한국어 결정판 ‘화산도’는 단행본 12권, 원고지 2만2000장, 인쇄 페이지 5456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역사소설이다. 이 작품은 1948년 제주 ‘4·3 사건’을 중심에 놓고 해방공간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을 다채롭게 조망하고 있다. 비록 허구적 등장인물과 사건 구성에 기반해 있다고 하더라도 ‘화산도’는 분명 한국 현대사의 핵심 장면과 시대적 전환을 포착하고 있는 ‘역사적 기록’이라 할 만하다.
혹시라도, 대하소설의 속도감 있는 문체와 드라마틱한 사건 전개를 기대한 독자라면 다소간의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 작가는 4·3의 히스토리를 그런 방식으로 구성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제주 도민의 독특한 언어와 풍습, 식민지의 친일 잔재와 배금주의적 세태 풍경, 그리고 이념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런 서사적 경향성을 일본 사소설(私小說)의 영향 관계로 해명하고자 하는 시도가 없지 않으나 ‘화산도’를 일본 문학의 독법으로 읽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 작품의 주요 인물은 ‘이방근’과 ‘남승지’이다. 전자가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방황하고 머뭇거리는 지식인의 형상을 하고 있다면, 후자는 사회 변혁에 대한 열정과 순수한 인간미를 지닌 행동하는 지식인이다. 이방근은 남승지를 비롯한 지하조직 세력을 측면에서 후원하기는 하지만, 자신은 직접 게릴라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다. 가족의 안위와 혁명의 당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이방근을 크게 변화시키는 것은 사상이나 이념이 아니라 ‘4·3 사건’ 이후 발생한 제주 도민에 대한 무지막지한 학살과 토벌이다.
‘4·3 봉기’ 장면은 이를 방증하는 예이다. 미리 무장봉기 시점을 알고 있었던 이방근은 4월 3일 새벽 ‘섬 전체에 타오르는 봉화’를 목격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주인공의 시점에서 복원되는 무장봉기는 선술집 주인으로부터 사후 청취된 이야기일 뿐이다. 이방근 자신이 체감한 성내(城內) 풍경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하다. 다시 말해, 김석범은 남로당 지하조직의 봉기 과정을 뜨거운 혁명적 열정이나 스펙터클한 민중의 승전보로 기록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흔한 전투 장면 하나 없다. ‘4·3 사건’은 열두 권의 작품 중 전반부(4권)에 배치되어 있다. 이는 이 소설이 무장봉기 부분이 아니라, ‘4·3 사건 이후’를 서사적 절정으로 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산도’는 교조적 이데올로그의 정치적 도그마(dogma)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김석범은 제주 ‘4·3 사건’이 특정 집단의 이데올로기나 투쟁 기록으로 함몰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서술 전략이 다양한 인물 군상에 대한 심리 묘사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인간적 욕망과 내적 갈등을 매우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는 부르주아 지식인 이방근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전사 남승지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서술 방법이다. 남승지는 “혁명은 긍정하지만 인생은 없다”라고 자조하거나, 게릴라 조직의 규율 위반을 감수하면서도 방근 여동생과의 만남을 갈구하기도 한다. 인간의 욕망은 종종 이념적 당위나 정치적 신념을 초과하기도 하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김석범의 ‘화산도’는 정교한 서사 전략과 균형감 있는 세계 인식으로, 우리 사회의 역사적 금기(taboo)에 도전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한반도 냉전 체제와 정치적 대결 구도 속에서는 감히 논할 수 없었던 제주 ‘4·3 사건’을 공론의 장으로 복기하고 복원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제주는 유일하게 미 군정의 ‘1948년 5월 10일 단독선거’를 무효로 만든 지역이다. 3·1절 발포사건으로 촉발된 제주 4·3 사건은, 식민 잔재(친일)에 대한 청산과 반성을 방기한 채 서둘러 국민국가 건설을 마무리하고자 했던 적폐 세력의 부당함을 증언한 역사적 사건이다. 물론 육지의 권력과 질서를 거부한 대가는 혹독했다. 제주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은 수십 년간 한국 현대사에서 지워져버렸다.
무술년은 4·3 사건이 융기한 지 70년이 되는 해다. 그러나 제주 곳곳에 기입되어 있는 저 처절한 홀로코스트의 흔적은, 여전히 진실이 규명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다. 과연 우리는 과거의 모순과 적폐를 충분히 청산하였는가. 김석범의 ‘화산도(火山島)’는 역사의 분화구 속에서 끓고 있는 진실의 마그마를 통해 그것을 질문하고 있다.
부산외대 한국어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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