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에서 기차로 3~4시간 정도 걸리는 요크 인근에 하워드 캐슬이라는 곳이 있다. 한국의 아파트 브랜드로까지 등장하듯, ‘캐슬’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사뭇 다양하다. 우리는 대개 캐슬을 성(城)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영국은 꼭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요즘에는 상징적 역할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귀족제도의 가장 큰 흔적은 영지와 저택이다. 귀족이 소유하고 있는 방대한 영지 위의 대저택을 예로부터 ‘캐슬’이라는 용어로 표현해 왔다고 한다. 실제로 하워드 캐슬은 명문 귀족인 노퍽 공작 방계 가문의 영지에 있는 저택이다.
우리의 상상을 돕는 계산법을 동원하자면, 이곳은 약 160만 평의 방대한 대지에 커다란 집과 다양한 정원 목축지 영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의 정원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과거를 기념이라도 하듯 옛 식민지에서 옮겨 심은 각양각색의 식물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영지의 외곽에는 여러 채의 행궁(行宮)도 찾아볼 수 있다. 이곳에 딸린 사람들을 위한 자체 기차역까지 가지고 있다니 그 크기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의 입장에서는 이 저택의 규모와 아름다운 정원에 놀라게 되겠지만, 실제 이곳을 유지하기 위하여, 또한 저택으로 상징되는 자신의 귀족 신분을 지탱하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했는지는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다.
최근에 발간된 책의 머리말에 나와 있듯이, “역사상 최초의 총력전이었던 제1차 세계대전에서 노동자·농민 출신 병사의 전사율이 7%였음에 비해, 귀족이나 지주 등 상류계급 출신 병사의 전사율이 25%였던 것”(박홍규, ‘복지국가의 탄생’)의 구체적 보기가 이 하워드 집안에서 보인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이 가문에서는 가용(可用)한 두 명의 아들을 모두 유럽 전선에 내보낸다. 한쪽 눈이 불편한 형은 벨기에 전선에 수송 장교로 참전하고, 그 아우는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당시 하워드 백작은 6남 5녀의 자녀를 두고 있었지만, 전쟁 전에 이미 4명의 형제 모두가 유명을 달리했으니, 말 그대로 남은 아들 2명을 고스란히 사지에 내보냈던 것이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 때 이곳은 피란 온 벨기에 사람들을 위한 수용소로,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부상병을 위한 병원과 징발된 다른 학교를 위한 대체 학교로도 활용되었다. 말하자면, 국가의 큰 위기에 집안이 솔선수범하고 나선 것이다. 실제로 영국의 귀족과 지주 계층이 선호하는 이튼스쿨의 경우 1·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사망한 2000여 명의 졸업생 명단을 자랑스럽게 게시한다는 전언(傳言)이다. 남의 나라 귀족 가문을 칭찬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토지를 매개로 했던 특권 계층을 옹호할 이유도 없다. 다만, 자신들의 특권이 그것을 갖지 못한 자들에 기반한다는 그들의 생각은, 이렇듯 국가위기에서 희생과 솔선수범으로 나타난다.
반면, 우리나라 현직 국회의원의 병역면제 비율은 16.5%로, 당장 일반 국민의 면제율 7.5%에 비해서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 영국 지배층 전사율과 견주게 되면, 이 수치는 우리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든다. 박홍규 교수의 책에서도 언급되듯, 양반이라는 이유만으로 병역은 물론 납세까지 면제받았던 과거 지배층의 몰염치는 오늘날에도 그 면면히 이어지는 느낌이다. 전통을 중시하는 나라라서 그런가. 120여 년 전 비숍이라는 백안(白眼)의 여성이 자신이 저술한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에서 구한말 당시 지배계급의 양태(樣態)를 적나라하게 까발린 바 있다. 비숍은 통치계급들이 일반 백성의 복지에는 무관심하면서 오직 자신의 배를 불리는 일에만 열중한다는 동학의 선언문에 주목한다. 또한 자신이 만나본 농민들의 가난함을 관찰하면서 ‘기생충’이라는 용어로 조선의 지배 계층을 힐난한 바 있다.
최근, 석연치 않은 이유로 군역도 빼먹은 한 전직 대통령이 정치 보복을 운운하면서 자신의 향한 수사에 강하게 불편함을 표시한 바 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각종 탈법과 불법을 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마치 정치적 희생자로 그려내려는 속셈을 드러내었다. 잘못이 없다면 과감하게 수사를 받으면 될 일이다. 잘못이 있었다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죗값을 치르면 된다. 그것이 한때 한 국가의 대통령으로서 군림했던 자의 책임과 의무이다. 하워드 캐슬을 생각하며 ‘고귀한 자의 의무’를 ‘허무’하게 되짚어 보게 된다.
부산외대 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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