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베트남 항구 도시인 다낭에 미국 항공모함 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베트남전 때 미군의 보급기지였던 다낭은 40여년 전만 해도 미 해군이 제 집 드나들듯 했던 곳. 그러나 5만8000여 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1975년 베트남에서 물러난 뒤 미 항모가 여기를 다시 찾은 것은 43년 만이다. 1995년 양국 국교 정상화가 이뤄졌지만 과거의 참혹함을 잘 아는 외신들은 ‘역사적인 방문’이라는 의미를 달았다.

미 항모가 다낭에 기항하면서 내세운 표면적인 이유는 양국 친선이었다. 그러나 이 행동이 날로 군사적 덩치를 키우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 베트남 역시 남중국해 패권 장악에 집착을 보이는 중국에 두려움을 느끼던 터여서 과거를 잊고 주저 없이 미국에 손을 내밀었다. 다낭항에서는 당초 우려와 달리 베트남인들이 미 항모 입항을 열렬히 환영했다니 이들에게 미국은 더는 예전의 적이 아니었던 것 같다.

국제사회에서는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다는 진리가 한반도에서도 적용될 모양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최근 가능한 한 조기에 만나고 싶다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메시지에 흔쾌하게 수락 의사를 밝혔다. 회동이 성사된다면 말 그대로 역사에 남을 ‘세기의 담판’이다. 절대로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다며 으르렁대던 미국과 북한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전광석화와도 같은 일의 진행에 눈이 어지러울 정도다.

더 눈길을 끄는 건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과거 어록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살임무를 수행 중인 로켓맨’이니 ‘병든 강아지’ ‘핵무기를 가진 미치광이’ 등과 같은 거친 언어를 사용하며 김 위원장을 깎아 내렸다. 이에 뒤질세라 김 위원장 역시 ‘겁먹은 개’ ‘노망난 늙은이’ 등의 말로 응수했다. 좀처럼 통제가 불가능해 보이는 두 사람 간 맞대응 수위가 점점 거세지자 국제관계 전문가들은 이런 말다툼이 실제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걱정스러운 전망까지 내놨다.

그랬던 앙숙끼리 한반도 비핵화 등의 중대사를 해결하려 머리를 맞댄다니 첫 인사말이 뭐가 될지도 궁금하기 짝이 없다. 여하튼 북미정상회담에서는 악담 대신 진중한 어투로 생산적인 대화를 주고 받기를 기대한다. 다툼 뒤에는 화해도 있어야 마땅하다. 싸우면서 정든다는 속담이 국제관계에서도 통할 수 있었으면 참 좋으련만.

염창현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