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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 칼럼] 판사님, 누가 약자인가요?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03-15 18:51:11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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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 바로잡았어야 했다. ‘미투(#MeToo)운동’ 자체보다도 그것으로 이뤄내려 하는, 반드시 만들어야 할 모멸과 분노 없는 세상 말이다. 뿌리가 너무 깊었다, 역사이기도 했으니. 어쩌다 비슷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져도 ‘아무리 농이라도 저따위로…’ 하며 눈살을 찌푸리거나 자리를 뜨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뿌리에 짓눌린 맹목(盲目)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터져 나온 ‘미투’에 번쩍 개안(開眼)하니 이 함성과 불길이 꼭 새로운 세상의 주춧돌로 결실을 보기를 바라게 된다. 그렇지만 역사가 되어버릴 만큼 깊고 굵은 뿌리가 그리 만만할까?
이제 봇물이 터지니 허겁지겁 입법의 목소리부터 쏟아져 나온다. 필요하다. 그런데 오만 가지 법이 제정된들 지금 같은 법의식으로 바른 세상이 이루어질까 의구심이 든다. 시효(時效)라는 이름으로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도 기막히지만 어쩔 수 없다 치자. 그런데 성폭행 등으로 기소된 범죄자 중에서 유죄 선고를 받는 경우는 40%대에 그친다는 사실에는 말문이 막힌다. 입건되었다가 기소되지 않는 경우까지 고려한다면 기막힌 분노로 한숨 짓는 피해자는 60%를 훨씬 넘을 테니.

이쯤에서 흔히 ‘강간’으로 불리는 우발적이거나 단순한 완력에 의한 성범죄는 일단 접어두자. 그것 역시 파렴치한 강력범죄이고 반인권 범죄임은 틀림없지만 지금은 알 수 있거나, 모르지 않으면서도 눈감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악창(惡瘡)이 된 뿌리 깊은 ‘권력적 성범죄’와 맞서는 중이니.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또는 추행죄의 구성요건은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하여’와 ‘위계 또는 위력으로 간음’이다. 관련 사실이 수사나 재판의 대상이 되면 대개 전자보다는 후자가 다툼의 대상이 되고, 첫 관계에서의 위계나 위력이 우선 쟁점이 된다. 물리적 폭력에 의한 상해 등의 직접적 증거가 있다면 그나마 수월하겠지만 이 경우의 위력에는 물리적 폭력이 수반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 위계 또는 위력을 입증할 수단은 주장과 정황이다.

두 사람만의 은밀한 공간에서의 일에 대한 주장과 부인. 행위 자체의 부인이 아니라 ‘합의’였지 ‘위력에 의한 강제’가 아니었다는 부인이라면 상당한 정황이 있어도 의심 정도에 그치기 십상이다. 더군다나 그 관계가 지속되어왔다면 의심은 점점 옅어진다. 이쯤에서 변호인이 나서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약자를 위한 법의 대명제를 내세운다.

‘유죄로 확정되기 전에는 무죄로 추정한다’ ‘유죄의 선고는 엄격한 증명에 의해야 한다’는 명제도 있다. 구체적인 설명을 않더라도 대략 무슨 뜻인지는 모두가 아는 바이며, 약자인 ‘의심받는 자’의 인권을 위한 법의 신성한 대원칙이다. 그 밖에도 정상참작 등 피고인을 위한 여러 조항도 있다. 마땅히 그러해야 하고, 그렇게 인권이 보장되는 세상을 위한 노력이 민주화 과정이었으니 굳게 지켜야 한다.

이제 판사는 선고한다. 먼저, 신성한 법정의 고매한 법관을 매도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어찌 법관이 한낱 변호인의 청탁이나 인연으로 저울의 추를 옮기랴. 다만 의심스럽기는 하나 명확한 입증에 이르지는 못하니 변호인의 주장하는 명제에 따라 유죄를 선고하지 못하는 것뿐! 하지만 뭔가 울컥하고 피해자의 기막힌 눈물에 한숨을 더하게 된다.

자, 성범죄 사건에 있어 진정한 약자는 누구일까. 그저 수사대상이 되었거나 기소되었다고 무조건 약자일까. 우리는 누구나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국선변호인을 제외하면 대부분 대가가 요구되는 권리이다. 또한 그 대가의 크기에 따라 보다 큰, 때로는 상식을 넘어서는 능력을 얻을 수도 있다. 게다가 ‘보호 또는 감독’하는 자였으니 처음부터 강자였는데 능력의 조력까지 받는 그가 약자라고?

‘처음부터 명확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묵시적 동의였다’는 주장도 흔하다. 하지만 위력이 꼭 물리적 완력이기만 할까. 피해자는 보호, 감독받는 약자였다. 삶과 앞날이 걸린 자리와 일터에서 불이익이 암시되고 예상된다면 상대의 눈빛과 말은 완력 그 이상의 위력이다. 그럼에도 강자가 피의자나 피고인이 되었다고 약자가 되어 인권을 위한 보루를 수혜받는다면 바르고 정의로운 세상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시각을 바꿔야 한다. 누가 약자인지 바로 보고 지켜주고 지속되어야 한다. 어쩌면 강자의 불이익을 결단하는 사회적 합의도 지금은 필요한지 모른다. 처음에는 명확하다가도 정치와 같은 권력이 개입되면 역겨운 다툼이 되고 본질이 가물거려지는 현상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무뎌지다가 지게 되면 약자는 영원한 약자, 강자는 영원한 강자로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문득 2012년 19대 국회의원 총선을 달궜던 ‘나꼼수’의 막말이 떠오른다. 글로 쓰기는커녕 차마 입에 담기도 낯 뜨거운 성적(性的) 욕설을 언론의 자유인 양 토해내다 호된 역풍을 맞지 않았던가. 다시 그들을 보지 않게 되거나 최소한 달라질 줄 알았다. 그렇지만 오래지 않아 다시 나타났고 방송가를 휘젓더니 달라지기는커녕 애초 그럴 의사가 없었음을 확인까지 시켜주고 있으니 역겹다 못해 희망이 없는 것 같아 서글프다.

하나씩 드러나는 힘의 횡포에 분노하고 ‘미투’에 진정 응원한다면 이제는 보다 단호하고, 그들보다 더 질겨야 한다. 쉽게 망각하고 다시 환호하는 사이에 더 음습하고 뻔뻔해진 것이다. ‘미투’는 젠더의 다툼이 아니라 권력과의 싸움이고 사람의 미래를 위한 투쟁이다. 수평의 저울에 강자와 약자가 나란히 앉는 것을 정의로 여겨서는 안 된다. 강자는 더 큰 책임을 지고 더 가혹한 대우를 감수해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은 마라. 처음에는 부당한 것 같아도 그렇게 바른 세상이 되면 강자는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누릴 수 있게 될 테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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