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은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생을 마감하기 두 달 전쯤인 2009년 3월 4일 ‘사람 사는 세상’ 홈페이지에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정치, 하지 마라.”
노무현은 이에 대한 설명을 해당 홈페이지에 비교적 구체적으로 남겼다. “정치, 하지 마라. 이 말은 제가 요즈음 사람들을 만나면 자주 하는 말입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하는 말입니다.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하여 잃어야 하는 것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지지자들은 이걸 퇴임 후에 그가 겪은 정치적인 고충을 나타낸 것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이명박 정부의 노 전 대통령 주변 수사 등을 연계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노무현의 ‘정치, 하지 마라’는 말은 이미 그전에도 나왔다. 그것도 대선 승리라는 대업을 달성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축하의 샴페인을 터뜨릴 때다.
2002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된 후 제주도로 간 노 대통령은 최측근 안희정과 이광재 둘만을 조용히 불렀다. 이날 둘은 기자들의 눈을 피해 다른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날아갔다. 2005년 출간된 ‘참여정부 절반의 비망록’(저자 이진 전 청와대 행정관)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적포도가 몇 순배를 도는 사이 밤 11시가 가까워졌다. 안희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노 대통령이 뜻밖의 제의를 했다. 총선(2004년 17대 총선) 출마를 포기하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내가 겪은 고통을 자네들이 또 겪게 하고 싶지 않아’라는 말을 하면서. 안희정의 손을 꼭 잡은 노 대통령의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안희정의 답변은 이랬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혼자서도 잘할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노무현의 16년 전 충고는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가 그토록 아끼던 안희정이 힘없는 여성 비서를 유린했다. 사람들은 안희정이 ‘권력형 나르시시즘’에 빠졌다고 했다. 차기 대권을 위해 충남도지사 3선까지 포기한 그는 일순간 잡범으로 추락했다. 노무현의 말대로 ‘정치를 안 했으면’ 어쨌을까. 권력을 잡지 않았더라면, 피해 여성들을 한갓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괴물’은 되지 않았을 거라는 안타까움이 더해진다.
권력은 칼끝의 꿀을 혀로 빨아먹는 것과 같다고 했다. 칼에 묻은 꿀은 달지만 자칫 그의 입술을 베일지 모른다. 그만큼 정치는 여차하면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는다.
그런데도 정치의 매력은 동서고금으로 식지 않는다. 특히 경제적으로 근대화와 산업화, 정치적으로 권위주의 독재와 민주주의 과정을 짧은 시간에 누구보다 역동적으로 경험한 대한민국에서 정치에 대한 환상은 더욱 유별나다. 부산시의회 의장을 오랫동안 지냈던 한 정치인은 퇴임 후 겪었던 권력의 ‘금단 현상’을 이렇게 전한 적이 있다. “의장 임기를 끝낸 뒤 자연인으로 돌아온 어느 날, 건물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는데 오질 안 와. 가만히 보니 버튼을 누르지 않은 거야. 오랫동안 수행 비서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미리 눌러 대기하던 습관에서 못 벗어난 거지….”
정치와 권력은 이 같은 판타지를 제공하지만 실상 불편한 것도 그 이상 많다. 우선 상당히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인 분야다. 세상 이치란 게 투자만큼 일정한 소득을 예상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정치만큼 뜻대로 되는 게 없다. 선거에서 당락을 가르는 3요소로 구도, 인물, 바람을 꼽는다. 하지만 정치 현실에서는 비이성적인 ‘바람’ 앞에 버틸 재간이 없다. 몇 해 전 총선 출마를 준비하던 차관 출신의 한 경제 관료는 기자에게 이렇게 하소연한 적 있다. “정치판에 들어와 보니 인물, 구도 아무 필요가 없습디다. 바람 불면 끝이더라고.”
세상이 깨끗해지면서 정치인이 갖는 메리트도 거의 없다. 예전에 사업하는 사람들이 선출직에 진출하면 “사업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고 ‘색안경’을 끼고 많이 봤지만 적어도 요즘에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사업에 소홀하고 현직 정치인으로 겪는 역차별로 인해 사업이 크게 기울어졌는데도 속앓이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다 가족과 지인 등 주변 사람이 겪는 고통이 너무 크다.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국민은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한 위임자로 지도자를 선출한다”고 설파했다. 국민은 선거를 통해 그들을 대리할 정치인을 뽑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정치인은 선출과 동시에 국민 위에 군림하려 든다. 지도자를 뽑았는데 지배자가 되려는 것이다.
다시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번에도 여지없이 정당마다 배지를 노리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행여 지배자가 되려는, 혹은 권력의 판타지에 끌려 출마하려는 사람에게 노무현의 유훈을 다시 전해주고 싶다. “정치,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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