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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 박인비가 ‘번아웃’ 되지 않는 이유 /이노성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03-28 19:03:51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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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식당’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다. 스페인의 한 작은 마을이 무대다. 배우 윤여정이 닭강정과 잡채를 판다. 그곳을 찾은 한 가족의 대화가 최근 SNS에서 화제가 됐다.

요약하면 이렇다. “한국은 일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다. 많은 젊은이가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거기서 하루 12시간 이상 죽어라 일한다. 그것도 평생 동안. 끔찍하다. 나는 조금 일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삶이 좋다.”

우리나라의 연간 근로시간은 2052시간(2016년 기준)이다. OECD 회원국 중 멕시코에 이어 2위다. OECD 평균보다 1년에 38일(305시간) 더 일한다. 일상화된 초과근로 탓에 일과 가정의 양립은 불가능하다.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는 20년 이상 야근하면 유방암 발생 위험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과다한 노동이 ‘발암 물질’이라는 의미다.

장시간 노동은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도 부른다. 자신의 연료를 다 태워버렸으니 하고 싶은 것도 없다. 한 취업사이트가 직장인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79.4%가 번아웃의 주요 증상인 극심한 피로와 무기력감을 느낀다고 했다.

골프 선수도 번아웃에서 자유롭지 않다. 20대에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를 주름잡은 태극낭자 상당수는 30대에 사라진다. 어릴 때부터 하루 10시간 넘게 운동만 하면서 부상에 시달리거나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탓이 크다. 명예의전당에 입성한 박인비(30)도 한동안 “더 이룰 게 없어서 부진한 것 아니냐”는 논란에 시달렸다.

그런 박인비가 지난 19일 LPGA 투어 뱅크 오브 호프 파운더스컵에서 우승했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쉼’이었다. “휴식기가 없었다면 더 많이 우승했을지 몰라도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 것 같지 않다. 앞으로 골프와 삶의 균형을 유지하고 싶다.”

박인비에 이어 2위를 한 로라 데이비스(55)는 더 인상적이었다. 서른만 넘으면 은퇴를 염두에 두는 여자 골프계의 ‘조로’ 현상을 고려하면 그의 ‘롱런’은 경이적이다. 만 42세의 크리스티 커(미국)는 지난 26일 KIA 클래식에서 2위에 올랐다.

두 선수는 공통점이 있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다. 데이비스는 유명한 축구 마니아다. LPGA 투어 기간에도 축구를 보기 위해 연습을 건너뛰고 TV를 사수한다. 커는 어머니의 유방암을 계기로 유방암 퇴치 기금 모금에 열심이다. 요리·낚시·와인수집이 취미인 커에게 번아웃이 있을 리 없다. 장수하는 남자 선수들도 비슷하다. 최근 PGA 투어 월드골프챔피언십 델 매치플레이에서 우승한 버바 왓슨(40·미국)은 유별난 가족사랑으로 유명하다. 아내와 입양한 아들·딸 얘기를 할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종종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해외여행 항공권을 예매한다. 그 덕분인지 지난해 세계랭킹 100위권 밖으로 밀렸던 왓슨은 올해 벌써 2번 우승했다. 밴드를 구성해 연주회를 여는가 하면 사탕 가게도 창업했다.

워라밸의 전제조건은 쉴 수 있는 시간이다. 우리나라도 오는 7월부터 주당 최장 근로시간이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단축된다. 그런데 일부 언론은 부정적인 측면만 부각한다. 근로시간이 줄면 기업 인건비가 늘고 근로자 소득이 감소한다는 논리를 편다. “스마트폰 후발 주자인 삼성전자가 애플과 어깨를 나란히 한 비결인 24시간 비상대기가 힘들어진다”고 걱정한다.

반대로 삼성이 세계 최초의 스마트폰을 만들지 못한 원인은 묻지 않는다. ‘저녁이 없는 삶’에선 성찰과 창의성도 사라진다는 점을 들추지 않는다. 적게 일하고 많이 쉬면 생산성이 늘어난다는 점도 모르는 체한다. 지난해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발표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주 5일 근무제’ 도입으로 국내 제조업의 노동생산성이 1.5% 상승했다. 이미 박인비는 휴식과 생산성의 상관관계를 증명했다.

네덜란드 인류사학자 요한 하위징어는 놀이가 인간의 특징 중 하나라고 했다. 놀이가 창의성을 만든다는 것이다. 휴식이 없으면 놀이도 없다. 노동시간 단축이야말로 20세기 포드주의에서 벗어나 4차 산업혁명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무엇보다, 외국인들로부터 ‘끔찍하다’는 말은 듣지 않아야 할 때가 됐다.

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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