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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칼럼] 자코메티와 걸어가는 사람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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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03-29 19:06:13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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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태생의 조각가이자 화가, 판화가였던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특별전에 다녀왔다. 조각, 회화, 드로잉, 판화 등 그의 작품 116점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의 대표작인 ‘걸어가는 사람’의 원본과 유작인 ‘로타르 좌상’의 원본 석고상이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전시된다는 게 이번 전시회 주최 측의 설명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을 빚어낸 조각가이며, 20세기를 대표하는 조각가인 자코메티의 작품들을 만나러 온 사람들로 전시장은 꽤 붐볐다. 공동의 수도와 공동의 화장실이 있는, 일곱 평 남짓의 작고 허름한 작업실에서 인간의 실존을 왜소한 선의 형태로 응축한 이 작품들을 탄생시켰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었다. “우습게도 내가 처음 (몽파르나스의 이폴리트 맹드롱에 위치한) 이 작업실을 가졌을 때 난 이곳이 매우 작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래 있을수록 이곳은 점점 커졌다.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곳에 넣을 수 있다”고 자코메티는 말했는데, 죽을 때까지 협소한 화실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의 작품 세계는 그곳에서 무한한 너비와 깊이로 확장되고 나날이 심오해졌다.

전시회장에 들어섰을 때 나는 한 장의 사진을 보고선 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자코메티를 찍은 사진이었다. 마른 몸의 자코메티가 왼손에 담배를 들고 빗속을 걸어오고 있었다. 우산을 받치지 못한 그는 빗방울을 피하려고 코트를 위로 끌어 올려 머리를 덮었다. 이쪽을 향해 바라보는 눈빛에는 서글픔과 쓸쓸함이 배어있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어떤 견고한 의욕 같은 것도 느껴졌다. 어쨌든 시선을 멀리 두고 빗속을 걸어오는 한 예술가의 이 사진은 은둔해 살면서 사물과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려고 했던, 허약하지만 까다롭고 고집이 센 한 예술가의 실물 초상 같았다.

전시회장에서 자코메티 작품의 모델로 등장했던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일도 흥미로웠다. 아내 아네트, 동생 디에고, 일본인 이사쿠 야나이하라, 연인 캐롤린, 사진작가 엘리 로타르 등이 그의 작품의 주요 모델들이었다. 동생 디에고와의 관계는 돈독했다. 전시회장에서 나는 자코메티가 엘리 로타르 반신상을 빚는 영상을 보았는데, 그 영상은 자코메티가 마지막으로 작업하는 것을 녹화한 것이기도 했다. 그 영상에 따르면 자코메티는 난방이 되지 않는 작업실에서 엘리 로타르의 반신상을 미완성 상태로 놓아두되, 진흙이 얼어 터질 것을 염려해서 젖은 천으로 반신상을 두르고 감싸놓고선 정기 검진을 받으러 병원을 찾게 된다. 그러고 나서 자코메티는 안타깝게도 작업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형이 세상을 떠난 날, 동생 디에고는 밤 기차를 타고 형의 작업실을 직접 찾아가 자코메티가 천으로 둘러놓은 석고 흉상을 주조하고 형의 무덤 위에는 그 청동 표본을 놓아둔다. 그리고 형의 마지막 작품인 그 흉상 옆에 자신이 청동으로 만든 작은 새를 나란히 앉혀 놓는다. 디에고가 형을 대하는 자세에는 형제애 이상의 뭉클함이 있었다.

“인간은 어느 날 갑자기 살아 있는 게임을 이유 없이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욕망이 너의 눈을 가려 삶을 이끌었다면, 인생은 생각보다 허망하고 덧없는 ‘꿈’이었음을 탄식하리라.” 자코메티의 이 말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자코메티는 19세의 나이에 함께 여행을 하던 피터 반 뫼르스가 호텔에서 갑작스럽게 죽는 것을 목격한 후 큰 충격에 휩싸인다.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평생을 불을 켠 채 잠을 자게 된다. 그러나 자코메티가 작품을 통해 드러내려고 한 메시지는 숙명적인 죽음 그 너머를 바라보는 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령 자코메티는 이렇게 말한다. “결국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래서 매일매일 탄생의 기적을 경험한다.” 우리에게 언젠가 도래할 죽음을 우리가 피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본다면 ‘인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로 인해 지금 살아 있는 이 순간이 보석처럼 소중한 시간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 테다. 그가 끝내 응시한 것은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막막한 낙담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생기와 삶의 빛나는 순간이었던 셈이다.

전시회장에서 가장 많은 시선을 받은 작품은 역시 ‘걸어가는 사람’이었다. 깡마른 체구에 큰 키의 한 사람이 보행하는 작품인데, 작품에 대한 느낌이 단순하지 않고 꽤 복잡했다.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는 듯했고, 눈빛은 강렬했으므로 어떤 지향을 선명하게 내비치는 듯했고, 발은 큼직해서 이 세계에 굳게 선 듯했고, 보폭이 넓어서 걸음이 몹시 단호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숙명적인 슬픔 같은 분위기도 전해져왔다. 적적하고 아름답고 미묘한 전율과 함께.

‘걷는다’는 말은 보행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작품 ‘걸어가는 사람’은 미래의 불안을 견뎌내며 묵묵하게 살아가는 우리들 실존의 모습일 것이다. 자코메티는 말한다.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걸어갈 때 새로운 가능성의 순간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자코메티는 말하는 듯했고, 또 그렇게 계속 걸어갈 때 새로운 시작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듯했다.

“난 살아있는 것을 표현하고 싶은 거야, 바로 생명을 표현하고 싶은 거야”라고 자코메티는 말했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 속에 숭고함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의 생명 에너지와 눈빛을 부각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가 몰두한 것도 눈빛과 시선을 담고 있는, 사람의 두상이었다. 그는 자신의 바로 앞에 앉은 모델의 눈을 가장 먼저 조각했다.

조각에 생명을 불어넣은 창조주라고 불리었던 자코메티. 연필이야말로 자신의 강력한 무기라고 자신 있게 강조해서 말했던 자코메티. 1966년 1월에 영면에 든 자코메티. 그가 예술 작품을 통해 의미심장하게 표현하려고 한 것은 좌절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였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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