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망울 열려다 멈칫한, 때아닌 3월 흰 눈이 부산의 도시와 산을 덮었다. 아침 햇살의 그늘에 실루엣처럼 펼쳐진 백양산은 동화 속의 그림이 되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아는지 느지막이 따스한 햇볕은 부드러운 바람을 만들어 찬 공기를 밀어낸다.
힘에 겨운 듯 해가 진 저녁엔 가기 싫은 추위가 그 자리에 다시 와 있다. 그렇지만 겨우내 추위를 견뎠던 꽃망울은 밤새도록 하나하나 꽃잎을 열어 아름다운 속살을 드러낸다. 먼발치 아지랑이 바람과 함께 걸어오면 나른한 허기가 밀려오던 옛 추억이 머릿속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시골에서 자란 나에게 봄은 아주 특별했다. 얼음판이 녹아 서운한 마음이 들 무렵 봄은 긴 겨울방학이 끝남을 알려주었다. 싫었지만 학교에 가야 하는 의무감에 아쉬움은 금세 잊었다.

학교에서 멀리 떨어져 등교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교통수단은 걷는 것이 유일했다. 버스는 십 리는 걸어, 읍내로 난 신작로나 가야 이따금 볼 수 있었다. 있지도 않은 자전거는 내가 타기에 너무 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집에서 학교까지 오 리는 걸어야 하는 등굣길을 서둘지 않으면 교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수업 시작 종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른 아침 학교 가는 오솔길엔 햇빛을 가린 산 그림자 사이로 진달래가 활짝 웃으며 지나는 우리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촉박하면 이마저도 못 보고 허겁지겁 걸어야 할 땐 그날따라 책 보따리가 더 무거웠다.

어쩌다 학교에 일찍 도착한 날 썰렁한 교실은 우릴 밖으로 내몰았다. 그래서 대부분 아이는 교실을 벗어나 햇빛을 찾아 운동장으로 나갔다. 여자아이들은 바람이 없는 건물 옆 양지바른 곳에 고무줄놀이로 시간을 보냈고, 남자아이들은 야구공만 한 고무공에 정신을 잃었다. 이미 운동장엔 너덧 팀이 서로 편을 갈라 이리저리 뛰면서 공 차는 아이들로 가득했다. 금세 운동장은 먼지로 뒤덮였으나, 그 먼지를 피하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서로 엉키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남의 공을 자기 공으로 착각하는 일도 없었으나, 가끔 고학년이 우리 공을 아무 방향으로나 내질러 기분은 상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종소리에 급히 교실로 들어온 아이들의 얼굴은 흘린 땀에 뒤집어쓴 흙먼지로 뒤범벅이 되었다. 이런 얼룩진 모습은 자신만 모르고 바라보는 친구만이 알 뿐이었다. 그래서 서로를 보면서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착각 속에 모두 웃었다. 이렇게 고무공은 아이들의 신나는 작은 우주의 놀이터를 만들었고, 정신을 빼앗아버리는 블랙홀이 되었다. 여전히 찬 기운이 가시지 않은 산골의 봄 날씨, 입은 옷도 변변치 않았지만 감기로 콜록대는 아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따듯한 기운이 맴도는 허기진 오후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려면 돌다리 냇물을 두 번 건너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물 흐르는 소리 따라 꼬불꼬불한 냇가로 향했다. 음지엔 아직도 녹지 않은 수정 같은 얼음이 흐르는 물에 손을 내밀어 닿는 소리에 화음이 되었다. 그 옆에 하나둘 하늘을 향해 피어오른 버들강아지 눈이 부신 듯 연녹색 하얀 솜털로 해를 가린다.

바로 그때 또래의 누군가 가늘고 길게 뻗은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 호띠기(버들피리)를 만들어 신나게 불어 재낀다. 어느새 같이 간 아이들 손엔 모두 호띠기가 들려졌다. 산중의 시냇가에 요란한 행진곡이 되어 냇가에 들렸던 바람과 물소리는 우리들의 버들피리 소리에 묻혀 버렸다. 배고팠던 아이들에게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자연이 준 선물 덕분이다.

인제대 스포츠헬스케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