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장에서 금융혁신의 속도가 급속히 빨라질 조짐이다. 혁신적 금융 아이디어와 IT기술이 결합하면서 핀테크라는 새로운 금융이 시작했지만, 금융혁신의 마지막 벽은 규제였다. 금융은 규제산업이라 불릴 정도로 촘촘한 규제로 유명하다. 이제까지 금융은 자본의 건전성, 공정 경쟁, 소비자 보호의 관점에서 규제가 필요하다고 여겨왔다.

그런데 기존의 규제가 금융혁신에 걸림돌이 되자, 영국이 ‘규제 샌드박스’라는 획기적인 전략을 내놓았다. 샌드박스는 아이들의 부드럽고 작은 놀이터 모래밭이다. 이곳의 어린이들은 다칠 위험이 낮아서 어른의 보호 없이도 마음껏 뛰어놀 수 있다. 이처럼 창의적인 기업들이 기존의 제약에서 벗어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실현해 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 것이 ‘규제 샌드박스’다. 여기서 혁신 기업들은 규제를 받지 않고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 비즈니스 모델 등을 시험 운영하게 된다. 2016년 6월 영국이 규제 샌드박스 실시를 확정·발표한 이후, 9월에는 홍콩 태국 인도네시아가, 10월 말레이시아, 11월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연합(UAE), 12월 오스트리아가 동참하는 등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지난해 도입 계획을 발표했지만 관련 법령 개정 문제가 있어 실시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영국은 이 계획에 따라 2016년부터 매년 대상기업을 선정했고, 싱가포르와 UAE도 2017년부터 대상기업을 선정·발표하고 있다. 더욱이 영국은 규제 샌드박스를 이용할 수 있는 대상 기업을 국내에 한정하지 않고 전 세계로 문호를 개방했다. 그러자 UAE는 아예 샌드박스 운영 주체 최고경영자에 싱가포르 출신 외국인을 앉혀 세계 각국의 핀테크 기업 유치에 나섰다. UAE는 샌드박스 대상으로 자국 기업 외에 영국, 캐나다, 인도, 이탈리아, 레바논, 사우디아라비아, 모리셔스, 싱가포르 등 다양한 국적의 기업을 선정했다.

부동산을 소액 증권화한 핀테크 사업을 성공적으로 에스토니아에 출범시킨 ‘클라우드 부동산(Crowd Realty)’은 아시아, 중동 시장 진출을 위해 싱가포르, 홍콩, UAE와 샌드박스를 이용하기 위한 절차를 진행 중이다. 이 회사는 미국계 투자 은행에서 부동산 투자업무를 담당하던 일본인이 2016년 발트해 연안의 에스토니아에 설립했다. 모국 일본이 아닌 외국에 회사를 설립한 이유는 에스토니아가 IT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고 크라우드펀딩, 블록체인 등 새로운 디지털 기술에 대한 규제가 간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에스토니아에 거주하지 않더라도 온라인으로 e-레지던스 신청이나 법인 설립은 물론 은행 거래나 세금 납부도 모두 가능하다.

이 회사는 전국 각지의 중소형 건물에 대한 자금조달 방안에 주목했다. 종래 부동산을 증권화한 금융상품으로 리츠가 있다. 리츠는 부동산을 기본자산으로 투자법인을 만들어 자본 시장에서 자금을 모으는 구조이기 때문에, 법인설립과 관리에 비용이 많이 든다. 그래서 리츠는 거액의 자금이 필요한 대도시의 초대형 부동산에 한정되어 있다. 거리에서 흔히 보는 작은 건물이 신축 또는 증·개축 자금을 조달하려면 저축한 돈을 쓰거나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어느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이 회사는 부동산을 증권화하여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출자를 받는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이다. 출자 단위도 계좌당 50만 원에서 100만 원 정도이며, 토지나 건물이 담보된 만큼 투자위험도 적고, 초대형 건물의 정보공시처럼 복잡한 이해보다는 직접 방문하거나 이용해 보고 투자를 결정하는 간편한 방식이다. 금융혁신은 이제까지 금융거래에 소외되었던 계층에게 많은 금융 혜택이 돌아가게 만든다. 중국 알리바바 그룹의 개미금융은 신용평가 항목으로 온라인 상품결제나 공공요금 지급 이력 등을 이용한 간편한 소액신용대출을 만들었다. 또 미국의 ‘온데크(OnDeck)’는 아직 영업실적이 쌓이지 않아 은행대출이 어려운 신생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사업의 속성, 예상 현금흐름, SNS 등의 데이터로 신용도를 산출한 대출업무를 시작했다. 금융의 첨단 기술기업화는 글로벌 시장의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IT기술의 발달로 모바일뱅킹, 간편결제 등의 서비스가 등장한 데 이어 인공지능, 블록체인,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등의 신기술을 접목한 새로운 금융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 ‘규제 샌드박스’가 금융혁신을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다.

전 한국IR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