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나는 나를, 우리를 믿을 수 없다 /박명호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18-04-13 19:29:21
| 본지 19면

지난 만주 여행 마지막 날 밤을 심양에서 보냈다. 비행기는 다음 날 오전 7시30분 출발이었다. 새벽 4시30분 모닝콜을 부탁해 놓고 일어나면 바로 떠날 수 있도록 짐도 모두 챙겨뒀다. 잠들기 전 텔레비전을 켜니 한국의 KBS ‘역사의 그날’이 방송되고 있었다. 나는 그 프로그램을 여러 번 본 바가 있어 밤 11시가 다 되어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잤다.

한참을 자다가 정각 시간을 알리는 휴대전화 알람 소리를 듣고 깼다. 그 휴대전화는 중국 여행을 위해 중국 지인에게 빌린 중국 휴대전화였다. 분명 새벽 4시일 거라 생각하고 10여 분 더 여유를 부린 다음 모닝콜이 오기 전에 먼저 일어나 준비를 했다. 그러나 금방 울릴 것 같은 모닝콜의 벨소리는 잠잠했다. 휴대전화의 시간을 확인했다. 밤 11시30분이었다. 말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잠을 푹 잤는데 고작 30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휴대전화의 고장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텔레비전을 켰다. 중국 텔레비전에는 대부분 시간이 잘 나오지 않았다. 아까 보았던 KBS 채널이 어느 구석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수많은 채널을 돌리다가 어느 한 곳에 밤 11시57분이라는 시간이 보였다. 그 시간 역시 엉터리였다. 그러나 엉터리가 둘이라면 그것도 시간이 정확히 일치한다면 내가 엉터리일 수 있었다. 그래서 휴대전화의 시간을 맞추어봤다. 정확하게 맞았다. 그렇다면 아직 밤 12시 이전이고 내가 시간을 착각한 것이다.

순간 나는 멍했다. 무슨 이런 경우가 있을까. 나는 분명 밤 11시쯤 잤고, 그리고 제법 깊은 잠을 잤는데 어째 시간이 30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일까. 한동안 생각하다가 아차, 했다. 중국 시간과 한국 시간의 차이를 나는 간과했다. KBS의 ‘역사의 그날’이 한국 시간으로 밤 10시대에 방송하는 것은 맞지만 중국 시간으로는 한 시간 이전인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잔 시간을 최대치로 본다면 두 시간 가량 되니 충분히 가능한 시간이었다.

충격이었다. 지금껏 이런 엉터리인 나를 나는 얼마나 찰떡같이 믿고 살아왔는가. 내가 너무 어이없어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한 번 터져 나온 웃음이 계속 이어졌다. 혼자서 그리 웃기는 처음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손바닥의 불을 보는 것보다 더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내 숨 쉬는 것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정말 어마어마한 충격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엉터리인 내 자신을 안 것이 그리 싫지는 않았다. 그것이 이번 여행에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기왕 잠도 안 오고 아까 보았던 ‘역사의 그날’이 생각났다. 그러면서 우리 문중 공적비가 떠올랐다. 내 10대조 할아버지가 대도호부사를 역임했다는 공적비다. 지금의 도지사급에 해당하는 큰 벼슬이었는데 역사책에 이름이 올려져 있지 않으니 후손들이 의아해 했다. 결국 문중에서 숙의 끝에 조사단을 구성해서 확인 작업을 했다.

그 공적비는 우리 문중의 자긍심이었다. 우리는 높은 신분의 양반 자손이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것을 지금껏 가장 확실한 그 공적비가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공적비가 가짜로 판명이 난 것이다. 나의 믿음이자 나를 세뇌시키던 그 멀쩡한 공적비가 ‘가짜’라니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신록을 중심으로 다른 자료들과 함께 조사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대도호부사 명단에 10대조 할아버지의 이름이 없었다고 했다. 혹시 ‘대’자가 빠진 그냥 도호부사인가 해서 80곳이 넘는 부사, 목사 명단도 뒤졌으나 찾지 못했다. 결국 가짜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현령이나 현감을 찾아보면 이름이 있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까지 확인하기에는 스스로가 너무 비참했다고 했다. 그래도 우리 가문이 믿었던 공적비에 대한 한 줌의 자존심 같은 것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10대조 할아버지가 현령이나 현감 정도 지내지 않았을까. 그것이 후대로 오면서 조금씩 지위가 부풀려 대도호부사까지 상승하지 않았을까. 그렇게라도 스스로 위안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역사란 당시 사실을 기록해도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인데 몇 대 뒤에 기록이란 그 정도의 부풀림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면서.

아무튼 10대조 할아버지가 대도호부사를 역임했다는 공적비 내용이 사실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조선왕조실록의 철저한 기록 정신으로 볼 때 지금의 광역시장이나 도지사급의 대도호부사 같은 큰 관직을 지낸 사람의 이름이 빠질 수는 없었다. 결국 공적비는 거짓임이 분명했다. 사실 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강한 사람을 무서워한다. 확신이 강하다는 것은 맹신으로 빠질 가능성이 크고 맹신은 지성의 가장 큰 적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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