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란드 블레이커(Roland Bleiker)라는 국제정치학 교수가 있다. 부산의 모 국립대에도 몸담았던 그는 현재 호주의 퀸즐랜드 대학에서 평화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의 주요 연구 관심사 중의 하나는 ‘감정의 국제정치’이다. 블레이커는 한국의 ‘한(恨)’을 통하여 국가와 단체 사이의 갈등 해결 방법을 모색하기도 했다. 한“국의 국제정치 학계는, 주로 현실주의적·정책중심적인 북미식 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그의 대안적 관점 연구를 낯설어하거나 불편해한다.
그런데, 블레이커는 한반도와 관련하여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스위스 출신인 그는 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스위스 또한 징병제이기에 병역 의무를 행해야 했던 그는 중립국 휴전 감시위원단 스위스 대표부, JSA로 판문점과 비무장지대(DMZ)에서 일했다. 이러한 연고로 비교적 자유롭게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한반도에 사는 여러 사람과 자유롭게 교류했다고 한다. 심지어 남한과 북한 막걸리 맛의 차이도 알게 되는 (자칭) 한반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그의 이러한 관심과 사랑은 미국의 한 유명 대학 출판부에서 발간된 ‘분단된 한반도(Divided Korea)’라는 저서에 집약된다.
남북한을 동시에 경험했던 그의 한반도에 대한 걱정은 비교적 간단한 질문에서 비롯된다. 블레이커는 “한반도에 사는 이 쾌활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왜 낡은 외생적 이데올로기 때문에 서로 싸우고 저주하고 있는지” 그 근원을 밝혀 보고 싶어 했다. 나아가서는 “낡고 문제투성이인 냉전적 사고를 더욱 새롭고 감수성 있는 시도를 통해서 (한반도의 긴장을) 바꾸어 나가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밝힌다. 이러한 냉전적 사고 이면에는 남북한 사이에 “서로를 적대시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과 이익을 유지”하는 목적이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남북한의 갈등 해결은 한반도에 사는 사람의 입장이 고려되어야만 하고, 동시에 절대로 군사주의 가치에 기대어서는 안 된다고 단언한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달포 사이에 두 차례나 정상 회담을 했다. 북미 정상회담 또한 기정사실로 되고 있다. 예전의 국제정치학적 문법에서 보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전쟁의 기운이 격하게 휘몰아치던 남북한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평화체제로의 노정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때 한반도를 사랑하는 사람, 블레이커의 걱정을 꺼내어 보자. 우선, 그동안 제안되었던 한반도 문제 해법은 이른바 한반도를 둘러싼 4대 강국의 군사 전략적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현재 북미 회담의 부분적 교착상태도 핵무기를 둘러싼 해결방법의 차이(일괄적 또는 단계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자칫 군사 안보와 강대국, 특히 미국의 전략적 가치에 한반도 문제가 갇힐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양국을 중재하고자 하는 문 대통령의 노력은 한반도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놓아서는 안 될 가느다란 끈이라 할 것이다.
북한을 과거의 갇힌 눈으로만 보는 것도 곤란하다. 이미 북한의 김 위원장은 전 세계적으로 여러 파격을 선사한 바 있다. 블레이커가 강조하듯 북한에 대한 우리와 서방세계의 이해는 사실에 기초하기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정형화된 또는 조작된 이미지에 기대고 있음’이 명백하다. 그동안 우리는 주로 정치적 정당성을 위해서 북한을 사악한 타자로 만들었고, 지금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번이 이러한 나쁜 굴레를 벗어나야 하는 좋은 기회인 듯싶다.
시대착오적 냉전적 구도를 넘어서는 평화의 강도와 심도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문 대통령이 강조하듯,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체제의 구축에 남북한이 함께 노력해야 함은 자명하다. 다만, 평화체제 구축이 이른바 ‘전쟁이 없는 상태’인 소극적 평화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점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전략적·군사적 가치 때문에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했던 많은 한반도 거주민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이른바 구조적 폭력에서 해방되는 적극적 평화의 요구도 지속해서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판문점과 DMZ에서 한반도의 처절한 군사적 갈등과 긴장을 몸소 체험했던 블레이커의 걱정은, 그래서 지금 더욱더 유효한 듯싶다.
부산외대 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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