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정상이 적대와 증오로 얼룩진 70년 한반도 냉전체제를 청산하는 대장정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일 정상회담을 갖고 발표한 ‘싱가포르 합의’가 그 출발점이다. 두 정상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미군 유해 송환 등 4개 조항에 합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동합의문에 서명한 뒤 “양측이 만족할 만한 결과”라며 “(북미가) 아주 좋은 관계를 구축하게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 위원장도 “우리는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 서명을 하게 됐다”며 “세상은 아마 중대한 변화를 보게 될 것”이라고 반겼다. 이로써 한반도는 평화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전기를 맞게 됐다.

북미 공동합의문에서 가장 눈여겨볼 만한 대목은 ‘4·27 판문점선언을 재확인한다’는 문구다. 판문점선언에서 남북은 올해 안에 6·25전쟁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이를 미루어 이 문구는 북미가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을 추진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북미 공동합의문에는 이와 관련된 조항을 ‘북미는 한반도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함께 노력한다’고 명시했다. ‘북미는 평화와 번영을 위한 두 국가 국민의 바람에 맞춰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기로 약속한다’는 조항도 주목할 만하다. 북한 비핵화와 함께 한반도 평화체제의 양대 축을 이루는 북미 수교 등 북미관계 정상화를 염두에 두고 있어서다.

하지만 북미 정상은 최대 관심사항인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체제 보장(CVIG)’을 맞바꾸는 데는 합의하지 못했다. ‘CVID’와 ‘CVIG’를 교환하는 일정 조율에 대한 이견 때문이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과 성 김 필리핀 주재 미국대사가 ‘비핵화(체제 보장) 시간표’를 짜기 위해 지난달 27일부터 정상회담 전날 심야까지 실무협상을 벌였으나 이견을 좁히는 데 실패했다.

이에 따라 ‘CVID’ 수용 문제와 비핵화(체제 보장) 일정 합의는 후속회담의 과제로 남겨졌다. 후속회담은 백악관이나 평양에서 열릴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김 위원장을 백악관에 초청하는 한편 자신도 “적절한 시기에 평양을 방문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김 위원장이 방미 초청을 수락했다고도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과) 협상하는 상황에서 군사훈련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도발적”이라며 한미연합훈련 중단 방침을 밝힌 것도 고무적이다. 북한이 대북 적대시 행위로 지목해온 사안이어서다.

북미가 ‘싱가포르 합의’ 실현을 앞당기려면 담대한 결단이 필요하다. 비핵화(체제 보장)의 초기 단계로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다시 가입하거나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을 북한에 복귀시키고, 미국은 그 대가로 종전선언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는 방안이 그 하나다. 이런 초기 조치가 이뤄지면 비핵화(체제 보장) 프로세스 진행에 가속도가 붙을 수 있다. 북미가 서로 믿고 비핵화와 체제 보장에 나설 근거가 확보되기 때문이다. 종전선언은 언제든 취소할 수 있는 정치적 행위여서 불안정하지만, 불가침조약은 미 의회 비준을 통해 법적 효력이 생겨 북한이 신뢰할 만한 비핵화의 명분이 된다. 이는 북한의 대북 적대시 철회 요구와도 부합한다. 북한의 NPT 재가입이나 IAEA 사찰관 복귀도 미국이 체제 보장의 명분으로 받아들일 만한 조치다.

북한 비핵화(체제 보장)의 성공 여부는 이제 북미가 실현 가능한 시간표를 작성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자신의 이익만 고집해서도, 필요한 과정을 건너뛰고 서둘러서도 안 된다. 그런 무리에는 ‘디테일의 악마’가 도사리고 있다. 지난 25년 간의 북핵 협상이 남긴 교훈이다. 북한 핵시설을 동결·해체하는 대신 경수로와 중유를 제공하기로 했다가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파기된 북미 제네바합의가 그랬다. 북한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했다가 같은 전철을 밟았던 9·19 공동성명 또한 마찬가지다.

과거의 시행착오들을 되돌아보면 뚜렷해지는 진실이 있다. ‘디테일의 악마’는 결코 외부에서 오지 않고, 내부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9·11사태 후 부시 정부가 책임 회피를 위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해 북핵 문제 해결 기회를 놓친 게 대표적인 예다. 이렇게 번식한 ‘내부의 악마’는 결국 북핵 위기를 키워 6차례의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통해 북한이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반도 평화체제가 이룩될 때까지 새기고 또 새겨야 할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