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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손을 잡거나 다시 싸우거나 /권융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06-20 19:33:10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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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고학년 새 교과서 중에 지리부도라는 것이 있었다. 그 맨 뒷장 양면에 걸쳐있는 세계지도의 중심부, 제일 넓게 자리를 잡은 영역은 회색으로 칠해져 있고 ‘소비에트연방’이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소련. 그때 그 나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는, 그 이름만으로도 거대한 불길함이 밀려오는 존재였다. 잿빛으로 침묵하고 있는 지도의 빈 공간은 소련이란 나라의 음울한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몇 살쯤 더 먹었을 무렵, 춘원의 소설 ‘유정(有情)’을 알게 되었다. 일본과 시베리아를 넘나드는 구식 문체의 그 사랑 얘기를 다 읽었는지는 분명치가 않다. 어쨌거나 그때 ‘바이칼’이란 단어가 서늘하게 가슴에 들어왔다. 회색의 빈 공간으로만 여기고 있던 그 땅에, 가을꽃이며 침엽수가 우거진 호반과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서른이 되었을 때,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논쟁이 무성하던 모스크바를 방문하게 되었다. 아직 ‘소련’이던 시절, 사회주의 체제의 심장 모스크바라니. 그곳에 머무는 한 주일 내내 형언할 수 없는 영감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전공인 무역학을 대학에서 가르치고는 있었으나 나날이 새로운 재미를 느끼지는 못하던 터라, 그때부터 이 미지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 혼자 공부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도서관을 아무리 뒤져도 러시아 혁명사나 톨스토이의 소설 같은 문학작품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본론을 읽지도 않은 채 자본론을 비판하고, 인터넷은 아직 보급되지 않았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다. 궁금한 것은 그곳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이었으나, 그런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1990년대 말, 연구년으로 머문 미국 대학의 도서관에서 산더미 같은 러시아 자료에 묻혀 한 해를 보내게 되었다. 지금은 비즈니스 목적으로 더 잘 활용되는 ‘지역연구’란 분야는, 동서냉전이 한창이던 무렵 상대를 잘 알기 위해 군사안보적 목적으로 탄생한 것이다. 눈이 번쩍 띄는 연구 성과가 가득했다. 논문 하나를 탐독하고는 그 참고문헌을 다시 찾아 읽는 꼬리 물기를 계속하다 보니, 어느새 사회학 도서관을 제일 빈번하게 드나들고 있었다. 그곳에는 제목에 ‘Daily Life(일상생활)’란 단어가 들어간 책이 많았다. 그 한 해는 온전히 러시아 사람들이 먹고 자고 일하고 자식을 기르는 일상의 이야기들 속에서 보내었다.

2018년은 대한민국의 역사에 특별한 연도로 기록될 것 같다. 판문점과 싱가포르에서 전개된 드라마는 얼마 전까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다. 앞으로 이 지난한 과제를 잘 풀어갈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기대가,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이 깊다. 그런데 새삼스러운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북한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TV에 나오는 북한 전문가는 늘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새로운 이야기도 별로 없다. 그런데 최근 어느 방송을 보니 북한 장마당의 풍경은 놀랍게도 우리네 시장이나 마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장마당 이야기는 익히 들었으나, 실상을 제대로 알 기회는 없었나 보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북한은, 우리 인식 속에 지리부도의 소련 땅처럼 잿빛 음울한 공간으로 남을 뿐이다. 식민지 시절에는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넘나들던 우리의 의식이 지금은 휴전선 앞에 멈춰 있다. 마치 그 너머로는 꿈꿀 필요도 없고 꿈꾸어서도 안 되는 것처럼. 이것을 일종의 집단적 의식장애라 보아야 하지 않을까.

러시아는 13세기부터 240년간 몽골의 혹독한 지배를 받았다. 세금을 바치는 대가로 자치가 허용되었으나, 남쪽 흑해 연안을 가로막은 무시무시한 몽골의 킵차크한국 때문에 서유럽과의 왕래가 불가하였다. 그 위쪽으로는 또 걸핏하면 러시아를 괴롭히던 강성한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벽을 치고 있었다. 러시아인들의 의식은 이 두려운 존재들 너머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추어 버렸다. 러시아가 오랫동안 낙후되었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이와 같은 서유럽과의 단절 때문에 당시 꽃피었던 르네상스의 세례를 받을 길이 없었다는 점을 꼽기도 한다.

우리 사정도 그와 비슷한 데가 있다. 그 너머에 르네상스가 있든 쑥쑥한 장마당이 있든, 의식의 한쪽을 깜깜한 벽으로 막아놓고서야 앞날에 대한 균형 있는 사고와 판단을 어찌 기대할 수 있을까. 우리 앞에 친구와 손잡을 일이 기다리든, 다시 또 엉겨 붙어 치고받을 일이 기다리든 말이다.

경성대 국제무역통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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