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미국 공화당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장례식이 전직 대통령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거행됐다. 추도 연사로 나온 고인의 딸은 아버지가 그토록 충성했던 미국은 항상 위대했다고 말해 박수갈채를 받았는데, 이는 현지 언론으로부터 트럼프의 탈선을 지적한 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녀의 의도가 무엇이었건 매케인 의원이 평소에 ‘독불장군’으로 불릴 만큼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무너져가는 미국 정신을 떠받쳐왔던 인물임은 분명하다. 해군 전투기 조종사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수년간 포로 생활을 거친 후 평생토록 공직에 복무하며 조국에 헌신해왔던 그는 공화당의 자존심이었다. 비록 그가 참전했던 베트남전쟁이 별로 자랑스럽지 못한 전쟁이긴 했지만, 그는 적어도 자유와 공정성,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라는 미국적 가치를 구현하고자 평생을 바쳤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소위 ‘보수’ 정치인들과는 격이 달랐다.

매케인이 추구했던 공화주의는 깊은 역사적 뿌리를 지닌 정치 이념이다. 이제는 시의성을 많이 상실했지만 이 유서 깊은 이념의 핵심 논지는 여전히 감동적이다. 한 공동체는 각 구성원이 스스로를 주인으로 자각하고 전체와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할 때만이 참된 공동체라 할 수 있다. 공동체의 안전이 외부의 적으로부터 위협받을 때는 용감하게 나가 싸울 뿐만 아니라 불의와 불공정이라는 내부의 적에 맞서 공공선을 수호해야 마땅하다.

로마 사상가 키케로의 영향을 받은 르네상스 피렌체의 인문주의자 마키아벨리는 스스로 무장하고 공적인 사안에 개입하며 시민적 덕성을 함양하는 자유로운 공동체의 이상을 설파했고 청교도혁명기 영국의 사상가 해링턴은 부패한 권력과 사회적 불평등에 맞서 법의 지배를 주창했으며 그의 영향을 받은 영국 공화주의자들은 이후 프랑스혁명기에 이르러 자신들의 모국이 아닌 프랑스공화국을 이념적 조국으로 생각했다. 우리네 ‘보수 우익’이 견지하는 맹목적인 국가주의와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지 않은가!

이러한 사고는 대서양 건너편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건국 선조들이 설파했던 자유는 타인으로부터 방해받지 않을 자유가 아니라 공공의 사안에 과감히 개입할 자유, 즉 정치적 자유였다. 불의와 불공정이 판을 치는데도 기껏 ‘민생’이나 외치고 있다면 그게 무슨 자유겠는가. 그들은 신대륙에 정치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옛 로마식 공화정을 부활시킨다는 야심찬 꿈을 품고 국가를 건설했다.

한때 청년과 지식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 감동적인 정치 이념은 현재는 설득력을 많이 상실한 상태이다. 어느덧 공화주의는 뉴욕 월가의 펀드매니저들과 군수산업 로비스트들을 대변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의 다른 이름으로 전락해버렸다. 따지고 보면 건국 초기에도 미합중국이 과연 진정한 민주공화국이었는지는 의심스럽다. 훨씬 오래전부터 그 땅에 살아온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축출했을 뿐더러 유럽으로부터 이주해온 가난한 백인 농민들의 이해를 제대로 대변하는 국가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럼 이 땅에서는 공화주의가 시도라도 해보았던가? 근대적 의미의 ‘공화’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입헌군주제를 지향한 개화파였지만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장이나 1948년의 제헌 헌법 모두 국민주권론에 기반한 민주공화국을 표방했던 만큼 공화주의는 건국의 첫 단계에서부터 줄곧 공식적 정치 이념으로 기능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식민통치와 전쟁, 독재로 물든 이 땅에서 공화주의의 자리를 대신했던 것은 묻지마식 국가주의와 그리스도교의 선악 개념을 닮은 억압적인 반공주의였다. 공화주의의 가장 기본적 요소인 사회적 정의와 공평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적 자유가 결여된 것이다. 이는 이념적 ‘보수’가 아니라 그냥 몰상식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민주적 정부도 들어선 마당에 공화주의를 제대로 한번 구현해보자고 나서야 할까? 매케인 같은 독불장군이 현실을 거스르며 애써 지켜내려 했던 골동품 같은 이념이 21세기 한복판의 대한민국을 위해 여전히 실현되지 못한 꿈으로 환기되어야할까? 우리가 추구해야할 것은 더는 공동체에 대한 숭고한 헌신도, 그렇다고 무작정 개인의 자유도 아니다. 이 땅을 밟고 있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도 공공의 목표를 위해 연대하며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향유하는 것이야말로 미래를 위한 정치적 과제이다.

만일 작금에 절실한 ‘적폐 청산’의 요구가 낡은 공화주의를 불러들여 국민 화합의 논리로 귀결된다면, 이는 적어도 진보 진영이 보기에는 너무 복고적이다. 물론 그것만 해도 적폐 세력이 치부를 가리기 위해 내세우는 얼치기 공화주의보다야 훨씬 낫지만 말이다.

부산교대 사회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