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영국 런던으로 휴가 여행을 다녀왔다. 무려 5년을 벼른, 아니 5년 동안 압박받은 여행이었다.
언니의 딸인 큰조카가 막 아홉 살 됐을 때 잠자리에서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읽어주며 호기롭게 선언했다. 이 책 전 시리즈를 완독하면 6학년 때 해리 포터의 고향인 런던으로 데려가 주겠다고. 설마 그 긴 걸 다 읽으려고, 설마 안 까먹으려고, 설마 그때까지 해리 포터를 좋아하려고 등등 안일한 생각으로 한 약속이었는데 아이는 전권을 다 읽었고, 약속은 찰떡같이 기억했고, 해리 포터 ‘덕후’가 됐고 이모가 한 약속을 수없이 상기시켰다.
여행을 준비하는 동안 ‘조카 바보’ ‘대인배’ ‘골드 미스’ 등으로 불렸는데 사실은 그냥 ‘바보’로 보는 사람이 많았다. 대충 계산해봐도 재정적 타격이 상당했지만, 사실은 무척 설렜다. ‘덕후들의 마지막 성지’로 불리는 영국의 워너브라더스 해리 포터 스튜디오를 찾을 강력한 핑계가 생긴 것이다.
런던은 판타지였다. 장기 할부 여행이라는 슬픈 팩트는 까마득히 잊고 손 꼭 잡고 런던 거리를 누볐다. 해리 포터 스튜디오에 관해서라면, 조카 표현을 빌려 ‘해리 포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후기를 나누기도 아까울 만큼’ 좋았다. 그런데 그게 생각했던 것만큼 화려하지는 않았다. 세트의 규모가 어마어마하지도 않았고, 영화팬이 기대할 법한 신기한 특수효과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 스튜디오는 1년 내내 문전성시를 이룬다. 매일 입장 인원이 정해져 있는데 성수기에는 적어도 석 달 전에 입장권을 예매해야 한다. 방문객 한 명이 나서서 육중한 중세풍 철문의 문고리로 ‘뚝, 뚝’ 노크하면 문이 활짝 열리고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그레이트홀을 재현한 세트가 펼쳐진다. 홀을 가로질러 걸으며 황홀하게 두리번거리는 방문객들은 마법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미 이들은 머글(마법사 아닌 일반인)이 아니다. 이들은 관람이 끝나면 허겁지겁 숍으로 달려가 지팡이 같은 기념품을 사잰다.
전 세계 해리 포터 팬들이 더 화려한 오사카나 LA의 해리 포터 스튜디오가 아닌, 런던 스튜디오를 ‘성지’로 여기는 것은 그 ‘오리지널리티’ 때문이다. 해리가 태어난, 부모를 잃은, 창고에서 구박 받으며 자란, 그가 입학한 마법학교가 있는, 소중한 친구들을 만난, 숙적 볼드모트를 물리친 모든 배경이 영국이다. 가상의 인물인 줄 알지만 이야기가 탄생한 영국에서는 그 모든 이야기가 ‘실재’가 된다.
서사가 콘텐츠화하고 실재가 되는 것이 이야기의 힘이며, 그게 바로 문화가 아닌가. 셰익스피어도, 킹스맨도, 노팅힐도, 비틀스의 음악도 런던에서는 다 현실이 되는 ‘스토리’다. 현대의 강국은 모두 막강한 스토리 생산국이다. ‘미스터 션샤인’의 김은숙 작가와 같은 걸출한 이야기꾼을 배출한 한국도 스토리 강국이 아닐 것 없다.
조카는 문화 충격에서 비롯된 후유증을 앓고 있다. “이모, 해리 포터가 사실은 사실이 아니고, 마법 같은 건 없다는 게 너무 슬프다”고 말한다. 그래서 터무니없는 위로를 해 주었다. 진짜 마법사는 해리가 아닌 거 아느냐고, 사실은 그런 마법 세계를 만들어 낸 조앤 K.롤링이 마법사라고. 너도 슬퍼만 하지 말고 어떤 마법이든지 한번 만들어보면 어떠냐고.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것 같긴 했다.
문화부 부장 ky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