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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칼럼] 청산리 벽계수야, 저 바다에 가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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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10-18 19:10:35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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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수도’ 부산에 ‘해양문화’가 없다는 비판이 있다. 당연한 비판이다. 해양문화 없는 해양수도란 그 자체로 모순이다. 그렇다면 왜 해양문화가 없거나 빈약한지 따져 봐야 할 일이다. 이와 함께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을 상기하게 된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세계의 해양문학을 소개하는 것을 들었다. 출연한 패널이 한국에는 해양문학의 전통이 없다고 논평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었다.
   
해양문화가 없고 해양문학의 전통도 없다는 것은 해양에 대한 의식도 없고 관심도 매우 낮다는 뜻이다. 해양에 대한 부정적 차원은 부산의 문제만이 아니고 우리나라 전체의 문제인 것 같다. 삼면이 바다인 나라에서 바다에 대한 의식이 빈약하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이에 나 같은 해양의 비전문가들도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다른 나라의 경우는 어떨까. 서구 사람들에게 해양문화는 오랜 전통이다. 신화와 고대 문학에서부터 그 전통을 찾아볼 수 있다. 트로이 전쟁에 나갔던 오디세우스 이야기는 해양문학의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바다, 배, 항해, 밤하늘, 별 등이 그렇다.

사상사적으로도 바다는 핵심적인 요소였다. 철학자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했다는 것은 퀴즈 프로그램에 나올 정도의 상식이다. 탈레스는 시내나 강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다. 대륙 형성의 기초로서 바다의 역할을 보았기 때문이다. 즉 해양의 관점에서 육지를 해석한 것이다. 바다가 중요해진 만큼 하늘에 대한 인식도 달랐다. 바다에서의 삶을 위해서는 천문 지식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하늘과 바다를 아우르는 총체적 인식이 중요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바다에서 모든 뱃길의 방향을 가리키는 정신을 이해하는 것’을 ‘모든 것을 통해 모든 것을 조정하는 예지’에 비유했다.

그리스 사람들은 배 만들기를 중요한 기술로 여겼다. ‘트리에레스’라는 삼단 노를 가진 배를 전선(戰船)으로 사용했는데, 시민들이 노 젓는 일꾼으로 참여했다. 전쟁사가 빅터 핸슨은 이런 참여가 아테네 시민들의 공동체 정신과 사회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배와 항해는 정치사회적 이념과 밀접했다. 서구 역사에서 정치·경제·문화적 근대화와 대항해 시대가 맞물려 있음도 우연이 아니다. 제국주의라는 인류 역사의 비극을 낳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서구에서 해양문화 발달의 주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가설이 있지만, 굳이 말을 만들어 표현하면 지형학이 아니라 ‘해형(海形)학적’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고대인들에게 대서양이나 태평양 같은 대양을 항해하는 일에 곧바로 나서는 것은 모험이 아니라 무모함이었다. 항해술은 체계적으로 발달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체계적이며 점진적인 항해술의 발달이 거대한 호수 같은 지중해에서 가능했다.

그러면 우리 이웃 나라는 어떨까. 중국 문명은 ‘황하 및 장강 문명’이다. 곧 대륙의 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했고 대륙의 중원을 차지하는 것이 정치·군사적 과제였다. 당연히 해양문화의 발달이 미진하다. 명나라 때 ‘정화의 대규모 원정 선단’은 예외의 경우다. 사상적으로도 유교와 도교는 해양친화적이지 않다. 일본도 근대화 이전에는 해양을 향한 진취적 전통이 빈약했다. 섬나라지만 광대한 바다로 바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해협 건너 한반도를 계속 넘봤다. 실리적 관점에서 일본인들은 대양 지향적이 아니라 ‘해협 지향적’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물은 항상 산과 연관되었다. 산수(山水), 산천(山川)은 곧 자연을 일컫는 말이었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해양 진출의 사료를 찾아볼 수 있지만, 적어도 조선 500년 동안은 해양친화적이지 못했다.

미술과 문학에서도 그랬다. 화가들은 주로 산수화를 그렸다. 황진이의 시에서도 바다에 대한 부정적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중의법으로 쓴 저 유명한 ‘청산리 벽계수’를 보자. ‘푸른 산속 흐르는 푸른 시냇물’에 쉽게 흘러감을 자랑 말라고 한다. 넓은 바다에 한 번 다다르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경고한다. 바다 ‘해(海)’는 검고 어둡고 크며 죽음을 내포하는 말이다. 황진이가 해양문화가 발달한 나라의 시인이었다면, “청산리 벽계수야, 어서 저 바다에 가보자꾸나!”라고 하지 않았을까.
이상의 고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해양문화를 만들어 가는 일은 근본부터 시작해야 함을 일깨워 준다. 정신이 바다를 지향해야 한다. 그래서 해양문학이 중요한 것이다. 바다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해양 의식이 없으면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문화적 성숙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곧 교육을 통해 얻어진다. 그런데 해양교육 커리큘럼은 우리 교육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을까.

둘째, 해양문화를 발전시키는 일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일러준다. 짧게는 수백 년, 길게는 천 년 넘게 없었던 전통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국가 차원에서의 총체적 참여와 지원 없이는 실현 가능해 보이지 않는 일이다. 한반도 전체가 적극적으로 또한 전폭적으로 지원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일이다. 해양관광의 차원에서 일부 해안 시설과 바다 교통수단을 확충하는 것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다. 부산이 이 대과업에 앞장선다는 것은 명실공히 해양수도로서 우뚝 서는 일이다.

혹자는 해양문화가 없으면 어떠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다른 할 일도 많은데 말이다. 하지만 해양문화의 발달은 바다로의 진출 이상의 시대적 의미가 있다. 전 세계가 본격적인 우주 시대에 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다와 우주의 연계는 고대로부터의 전통이다. 바다 이야기를 하지 않고 하늘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천문 없이 해양을 논할 수 없다. 인류의 우주 진출을 이해하려면 항해를 이해해야 한다.

   
천체물리학자 칼 세이건은 “별들은 탐험가의 친구이다. 그들은 예전에 지구의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과 함께했고, 지금은 하늘의 바다를 항해하는 우주선과 함께한다”고 말했다. 우주를 여행하는 기구를 마치 항해하는 배처럼 ‘우주선’이라고 한다. 오늘날 일상화된 이 말에는 인류 역사 속에서 축적된 해양과 천체의 의미심장함이 모두 담겨 있다.

철학자·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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