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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칼럼] 가을과 두 분의 시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10-25 19:17:55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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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가는 이즈음에 생각나는 분이 있다. 작고하신 최하림 선생님이시다. 요 며칠에는 선생님의 시집을 다시 펼쳐 읽고 있다. ‘마음의 그림자’라는 시를 읽을 때는 가을의 눈동자를 보는 듯했다. “가을이 와서 오래된 램프에 불을 붙인다 작은 할머니가 가만가만 복도를 지나가고 개들이 컹컹컹 짖고 구부러진 언덕으로 바람이 빠르게 스쳐 간다 이파리들이 날린다 모든 것이 지난해와 다름없이 진행되었으나 다른 것이 없지는 않았다 헛간에 물이 새고 울타리 싸리들이 더 붉어 보였다”라고 쓰셨다. 점차 비어가고, 깊어가고, 스산해지면서 가을의 시간이 움직이고, 지나가는 것을 풍경을 통해 담담하게 표현했다.
최하림 선생님을 뵌 적은 몇 번 되지 않지만, 선생님을 뵈었던 기억은 “램프에 불을 붙인 듯” 매우 또렷하게 남아서 나의 내면을 비추고, 시 쓰는 나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선생님의 나직한 음성과 인자한 표정과 간소한 말씀, 깊고 아늑하고 고요한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선생님은 마음의 파동을 매우 자세하게 읽으신 분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시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잊지 않으셨다.

최하림 선생님은 암 투병 중에 시 전집을 펴내면서 이렇게 쓰셨다. “마침내 나는 쓰기를 그만두고 강으로 나갑니다. 나는 바위에 앉습니다. 비린 내음을 풍기며 강물이 철철철 흘러갑니다. 세상은 어느 만큼 살았으며, 세상 흐름을 얼마쯤 내다볼 줄 아는, 죽은 자들과 대면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나는 흐르는 물을 붙잡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순간에 강물은(혹은 시간은) 사라져버리겠지요. 그런데도 내 시들은 그런 시간을 잡으려고 꿈꾸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흐르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우리도 흐르는 물과 같아서 멀리 흘러가는 것일 테다. 그럼에도 한 편의 시는 흐르는 그 시간을 붙잡아보려는 하나의 의욕인지도 모른다.

이 가을에 늦게 알게 된, 작고하신 어른 한 분이 또 계신다. 시인 임강빈 선생님이시다. 나는 대전에 사셨던 선생님을 아쉽게도 뵌 적이 없다. 평소에 “사과는 제맛을 모르면서 익어간다, 시인은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고 이르셨다고 한다. ‘도이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者成蹊)’, 즉 복숭아 오얏꽃은 스스로 말하지 않지만 자태와 향기 때문에 그 아래에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서 소로(小路)가 저절로 생긴다는 가르침을 자주 인용하셨다고 한다. 특히 임강빈 선생님은 신독(愼獨)의 삶을 사셨던 분이셨다고 한다. 어떤 일의 결실을 빨리 얻기를 고대하지 말고, 마치 사과가 하루하루 익어가듯이 묵묵하게 자신이 하는 일을 해나갈 것을 당부하신 것이고, 자신을 잘 단속하여 스스로 향기롭다면 세상의 인심을 또한 얻게 된다는 말씀일 것이다.

글 쓰는 이들은 ‘내게 글 쓰는 일은 무엇인가? 어떤 시인이, 작가가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수시로 하게 된다. 물론 이 질문을 독자들로부터 받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글쓰기가 이 세계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를, 과연 세계를 돕고 이익이 되는 일을 하는지를 자문하기도 한다.

최근 개봉한 영화 ‘호밀밭의 반항아’는 글을 쓰는 사람이 겪게 되는 여러 고민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 영화는 작가 J. D. 샐린저가 쓴 위대한 걸작 ‘호밀밭의 파수꾼’이 탄생하게 된 과정을 다룬다.

영화의 대사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갖게 되는 회의와 갈등 그리고 그 극복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질문은 ‘설령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해도 평생 글을 쓸 수 있겠는가?’인데, 이 질문은 ‘설령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해도 평생을 바치고 싶은 것이 있는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응당한 대가가 있지 않더라도 순수한 열정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영화의 주인공 제리 샐린저가 스스로 찾은 대답은 “제게는 화가 나는 일이 많아요. 그런데 글을 쓸 때 좀 풀리는 것 같아요”라거나 “마음은 계속 이야기를 써가요. 손에 펜이 들렸든 총이 들렸든 창작은 결코 멈추지 않아요”와 같은 답변들이다. 내면에서 찾은 이 대답들은 “나는 고기와 치즈 유통으로 우리 집안을 먹여 살렸어!”라며 가업을 이어가기를 권하는 아버지의 제안을 거부하면서 스스로 얻은 것이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이 의미 있고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계속해나가는 그 꺾이지 않은 의지로부터 생겨난 것이기도 하다.

글쓰기의 사례에 국한해 보더라도 창작의 순간부터 출판의 순간까지는 험난한 일이 많다. 마치 성냥불이 켜지면서 깜깜한 어둠을 일시에 밀어내듯이 내가 나의 내면으로부터 빛과 같은 문장들을 발견하는 일이 우선적으로 쉽지 않고, 그 문장들을 고치고 또 고치는 일이 쉽지 않고,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출판사와 주고받는 의견의 교환과 조율이 간단하지 않다. 책이 출간되기만 하면 그 책을 쓴 이의 고민이 종결되는 것도 아니다. 우선 독자들의 반응이 있다. 실망한 독자는 “당신도 결국 엉터리야, 다른 사람들처럼!”이라고 말하며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리고 책을 출간한 이후에는 또 다른 것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내가 가진 능력을 세상에 내놓고 그것에 대한 값을 받으며 우리는 생계를 이어간다. 쌀과 과일을 시장에 내놓든, 새로 출시한 공산품을 내놓든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내가 만든 하나의 제품이 완성될 때까지는 반복되는, 고된 노동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받게 되는 노동의 대가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잦다. 그러나 일을 멈출 수도 없다. 이러할 때 우리를 버티게 하고, 기댈 수 있는 것은 내일에의 꿈과 자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열정밖에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시를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나는 이 가을에 두 분의 시인을 생각하게 된다. 한 해가 벌써 이렇게 빨리 지나갔나 싶을 정도로 가을이 깊어가는 때에 내가 거둬들인 것에 대해 생각하거나, 내가 앞으로 감내하며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할 때면 시인의 삶을 말 없이 잠잠하게, 아름답게 가꾸신 두 분의 시인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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