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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걷는 도시, 부산에 ‘보행 간선망’을 /박창희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10-29 19:10:47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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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가장 빨리 걷는 사람은 혼자 걷는 남자라고 한다. 뭐가 그리 바쁜지, 쏜살같이 걷는다. 하지만 멀리는 못 간다. 도심 보행로가 발목을 잡는다. 있어야 할 곳에 횡단보도는 없고, 이면도로에선 차들이 빵빵거리며 갑질을 한다. 빨리 걷는 도시의 남자가 슬퍼보이는 이유다.

얼마 전 작심하고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서면까지 걸어 보았다. 인도 곳곳에 적치물이 널브러져 있었다. 보행자를 위한 안내표시는 없었다. 차량들은 당연한 듯 소음과 먼지를 날렸고, 보도블록은 들쭉날쭉 삐뚤빼뚤한 곳이 더 많았다.

그렇게 중앙대로를 따라 부산역~좌천역~범일동~범내골을 지나 서면 1번가에 도착했다. 7.8㎞에 2시간 걸렸다. ‘전투하듯’ 걸었으나 느낌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생각보다 걸을 만했다는 느낌이었다. 평소 그냥 지나친 도시 풍경을 살핀 건 망외의 소득이었다.

걷는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은 화두가 있었다. ‘보행 간선망’이다. 도시 전체를 걸을 수 있게 간선·중추 보행망을 만들자는 개념이다. 지금까지의 도시·도로·가로계획은 모두 도로와 차량 중심이었다. 인도(보행로)는 곁가지였다. 차로를 내고 남는 것이 인도였다. 산업사회의 토건행정이 자동차를 극진히 떠받든 결과다. 인도를 확보해놓고 차로를 주는 이른바 ‘미노베 원칙’은 남의 나라 얘기였다.

보행권이 제대로 지켜질 리 없다. 선진국들이 수십 년 전부터 논의해온 보행권이 국내에서 제기된 건 몇 년 안 된다. ‘보행 및 편의증진에 관한 법률’이 2013년에야 제정됐다. 보행권은 온데간데없고 연말이면 보도블록을 교체하는 게 일이었다.

‘보행 간선망’을 설정해 보도 통합관리를 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보행권과 보도블록 설치 같은 기초적인 문제 해결은 물론 걷고 싶은 환경이 조성된다. 걷는 시민이 늘어나면 선진국처럼 저탄소 녹색도시, 저비용 행복도시, 고품격 문화도시로 바뀐다.

‘보행 간선망’이 복잡할 것 같지만 설계는 의외로 단순하다. 기존의 보행길을 적절히, 유효하게, 잇거나 다듬고 고쳐서 엮으면 된다. 부산에는 모두 95개, 총연장 1033㎞의 각종 보행길이 있다(2017년 부산시 현황조사).

구심점은 부산 최대의 도심인 서면(부전동)으로 잡는다. 서면 교차로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보행 간선(幹線)을 열어간다. 동쪽은 남·수영·해운대구·기장군, 서쪽은 북·사상·강서구, 남쪽은 동·중·서·영도·사하구, 북쪽은 연제·동래·금정구가 된다.

이렇게 동서축, 남북축의 보행 동선이 형성되면 지선(支線)을 내고, 지선은 각 지역별 테마길, 마을길, 골목길, 시장길을 엮는다. 기존 갈맷길과 추진 중인 누리길, 천리길(도심 보행길)도 함께 엮인다. 각종 보행길이 엮이면 공간별·주제별로 나누고, 이를 다시 테마길, 젊음의 길, 차없는 길, 이야기길, 순례길 등으로 분류한다.

각종 보행길과 테마길, 탐방로가 씨줄 날줄로 엮이면 부산 전체의 보행 동맥~정맥~모세혈관이 형성된다. 비로소 보행 피돌기가 이뤄지고 사통팔달 걸을 수 있는 도시가 만들어진다.

부산은 산, 강, 바다를 품은 데다 터널이 많아 보행 간선망을 열기가 사실 어렵다. 하지만 느림의 보행 미학으로 접근하면 약점은 장점이 될 수 있다. 강길 산길 바닷길을 열어 안전성과 쾌적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선진국들이 자랑하는 녹지축·그린웨이 같은 ‘녹색회랑’이다. 선진국들은 국가 단위 또는 도시 차원에서 다양한 형태의 자연과 역사·문화를 즐길 수 있는 녹색회랑 탐방로를 갖추고 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영국의 내셔널 트레일, 프랑스 랑도네, 일본의 장거리 자연보도, 쿠바의 혁명길 등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볼 때 부산은 세계적인 녹색회랑 탐방로를 가질 수 있는 훌륭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것을 완성하는 종합 밑그림이 ‘보행 간선망’이다. 이게 구축되면 부산은 아마, 350만의 대도시 중 세계 처음으로 보행 간선망을 갖는 도시로 기억되고 브랜딩될지 모른다.

자동차 중심의 사고로 보면 ‘보행 간선망’은 발칙한 구상일 수 있다. 그러나 도심 보행길이 연결·안전·소통돼야 한다는 관점에서는 보행혁신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 꿈은 초점이 맞아야 이루어진다. ‘보행 간선망’이 한낱 꿈이 아닌 초점 있는 정책이 되길 희망한다.

칼럼니스트·스토리랩 수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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