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어떤 드라마가 기억난다. 충청도 산골에 온 총각 선생님을 좋아하는 시골처녀가 새가 지저귀고 물이 흐르는 계곡에서 선생님을 애타게 부르는 장면이다. 라디오 드라마였다. 당시에는 책을 읽거나 라디오를 들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이미지, 상황을 각자 자유롭게 상상했다. 60년대 말부터 흑백 TV가 들어와 어느새 대부분 가정의 거실을 점령했다. 전력 부족으로 저녁에만 방영되는 TV 앞에 온 가족, 동네 사람들이 저녁 내내 앉아 있었다. TV가 가진 흡인력과 중독성이 대단하다. TV가 직접 생생하게 보여주므로 머릿속 상상은 불필요하다. 오죽하면 바보 상자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진공으로 된 유리관 안에 전자빔을 쏘아 전자기 코일로 방향을 조절하여 인을 바른 유리벽 내 원하는 점에 충돌시켜 빛을 내는 음극관은 1897년 처음 발명되었다. 1922년에 상용화되기 시작하여 전자신호 파형을 보여주는 오실로스코프와 흑백 TV에 사용되었다. 1954년에 음극관 앞에 적, 청, 녹색의 작은 점들로 구성된 컬러필터를 설치하여 다양한 색상을 만들어내는 컬러TV가 상용화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LCD(Liquid Crystal Display·액정표시장치) TV가 등장하였다. LCD는 형광등 같은 발광체에서 나오는 빛을 아주 미소한 액정에 전압을 걸어 개폐 정도를 조절하여 전면에 있는 컬러필터를 통과하게 하여 다양한 명암과 색상을 만들어낸다. 수년 전부터 백라이트로 형광등 대신 전력소모가 적고 수명이 오래가는 발광 다이오드를 부착한 LED TV가 보편화되었다.
디스플레이 및 TV 제조업체들의 신기술 경쟁은 끝이 없다. 선명도를 높이기 위한 명암비, 스포츠 등 급히 변하는 동영상을 자연스럽게 재생하기 위한 빠른 응답시간, 광시야각, 소모전력, 가격 등을 개선하는 경쟁이 치열하다. 백라이트와 액정 개폐소자를 사용하던 종래 방식은 개폐소자를 통하여 원하지 않는 빛샘이 발생하고 액정으로는 완벽한 빛차단이 되지 않아 명암비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높이거나 완벽한 검은색을 구현하기 힘들다. 컬러필터의 화소별로 미세한 유기발광소자를 부착해 직접 빛의 강도를 자유롭게 조절하여 명암비가 뛰어난 OLED(Organic Light Emitting Diode· 유기발광다이오드) 디스플레이가 근래에 상용화되었다.
한편 빛을 받으면 각기 다른 색상을 발하는 수 나노미터 수준의 미세한 반도체 입자를 발광체로 이용하는 양자점(Quantum Dot) 디스플레이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아직은 화소별로 다른 색상의 양자점을 만들어내는 대신에 LED 백라이트 앞에 양자점을 코팅한 필름을 부착, 빛을 정제하여 색상 재현력을 높이는 방식을 TV에 사용하고 있다. 언젠가는 컬러필터를 없애고 청색 백라이트를 사용하여 적, 녹 양자점을 직접 발광시키는 방식, 컬러필터뿐 아니라 백라이트까지 없애고 양자점만으로 직접 발광하는 완벽한 양자점 TV가 등장할 것이다.
세계 1, 2위를 다투는 디스플레이 및 TV 제조업체가 우리나라에 있다. 두 회사는 OLED TV와 QLED(양자점 LED) TV로 완벽한 명암비 구현 여부, 유기발광소자의 번인 현상 유무, 색상 재현력 등을 놓고 서로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최근에는 수십에서 수 나노미터 크기의 초소형 청색 LED와 색상조절용 양자점을 결합한 마이크로 LED가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쉽게 말해 경기장의 대형 전광판을 초소형으로 압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4K UHD(Ultra Hihg Definition)를 위해서는 2500만 개의 초소형 LED와 양자점을 균질하게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 반도체 제조와 유사한 공정으로 초소형 LED를 만들어 한 개씩 옮겨 붙이는 것은 시간, 비용, 품질 측면에서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도장 찍는 것과 비슷한 인쇄방식으로 마이크로 LED를 부착하는 방식이 개발되고 있다.
오늘날 젊은 세대는 활자보다 유튜브, 스마트폰 등의 영상에 익숙하다. 눈으로 직접 보는 것과 비슷한 초실감 영상이 TV나 벽 등에 일상화될 날이 멀지 않았다. 그러나 동영상이 더욱 실감나게 될수록 머릿속으로 다양하고 자유롭게 상상하는 힘은 더욱 사라질까 걱정된다. 가뜩이나 상상력과 창의성이 부족하다는 우리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KAIST 산업 및 시스템 공학과 교수·대한산업공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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