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간 산골에 비가 내렸다. 우리 집 마당을 대표하는 모과나무 두 그루의 가지에 얼마 남지 않은 모과가 모조리 떨어졌다. 이 비만 그치면 본격 겨울이 시작될 터다. 화목보일러를 사용하는 우리 집으로선 땔감을 마련하는 게 가장 걱정이다. 귀촌 초기에는 지게 없이 홀로 뒷산에 올라 나름대로 나무를 켜서 가져왔지만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아니면 그 새 몸이 게을러진 것인지 도통 가기가 싫어진다. 게다가 중고등학교를 이곳 산청 민들레 대안학교에서 보냈던 힘 좋고 씩씩한 아들 녀석조차 대학에 다닌다고 집안일을 나 몰라라 하는 바람에 정말 난감하다.
최근 정말 오랜만에 옛 직장 동료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 안부는 별 관심이 없고 아직 남아 있는 동기 중 누가 사무관으로, 서기관으로 진급했다고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역시 직장은 오래 버티는 놈이 장땡이라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하는 계기가 됐지만 나는 아직도 남아 전쟁 같은 삶을 사는 동료들이 부럽기는커녕 불쌍하게 생각됐다. 그렇게 생각되는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나는 아내의 강압과 자식들 눈치 때문에 몸이 아파도 꾸역꾸역 돈벌이를 나가는 딱한 지인 몇몇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는 6년째 사흘에 한 번꼴로 술에 취한 채 내게 전화해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정년까지 버티기 위해 퇴근 후 오로지 술 힘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그렇다고 마냥 시골 생활이 돈 걱정 없이 넉넉하고 행복하다는 말은 아니다. 귀촌 후 약간의 연금 외에 수입이 없었던 나는 인근 도시에 나가 정신병원 보호사 노릇도 했고, 지난해부터 올여름까지 일 년 반을 내가 사는 마을의 면사무소에 한시 임기제로 마지막 공무원 생활도 했다. 나도 그때는 정말 힘들었고, 이른 퇴직과 귀촌을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돈벌이 대신 얻게 되는 여러 가지 혜택, 즉 미세먼지 없는 맑은 공기와 텃밭을 일구면서 흘리는 땀에 비례한 기쁨 그리고 집 앞 베란다에서 통기타를 치며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도 민원이 없다는 사실 등을 생각하면 나는 시골 생활에 감사한 마음이 드는데, 그보다 더한 이점도 있다.
사실 나는 지난 8~11월 합천에 있는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의 입주작가로 있었다. 그곳에서 제공하는 원룸과 작업실 그리고 하루 세 끼 식당을 이용할 수 있는 여건에 나는 모든 자질구레한 일상은 접어두고 오롯이 창작에만 매달렸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밥 먹고 산책하는 시간 외에 장편소설뿐만 아니라 시나리오에서부터 수필까지 여러 편의 작품을 썼다. 글이 막힐 때면 건물 관리자는 기겁을 하겠지만 늦은 밤 원룸에서 낮에 몰래 반입한 소주를 마시며 기타를 쳤다. 그도 아니면 낮에 차를 몰고 합천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합천엔 그 유명한 이주홍 선생의 아동문학관이 있고, 지금은 루게닉병으로 힘든 투병 생활을 하지만 아주 예전 멘토였던 소설가 정태규와 현재 부산작가회의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전성욱 평론가의 고향이기도 하다. 나는 그곳에서 무엇보다 잔소리할 아내와 칭얼대는 아이들이 없어 완전한 자유를 맛보았다. 이제 당분간 그곳에 갈 수 없어 무척 섭섭하기도 하지만 내년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여전히 설렌다.
“나처럼 좋은 직장을 가진 사람이 누가 또 있겠어.” 나와 학교에 가는 딸아이의 아침을 차려주고 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나온 아내의 이 말이 걸작이다. 귀촌 후 전문적인 자신의 직업 대신 읍내에서 친환경농산물판매점을 열어 운영하는 아내는 매일 오전 11시 반께 출근한다. 도시에서 맞벌이할 때 꼭두새벽에 일어나 가족의 아침밥을 준비하며 늘 바쁘게 살던 그녀였다. 지금은 백수 남편을 믿고 출근했다가 돌아오면 어느새 집안일이 깨끗이 정리돼 있으니 그녀는 요즘 만사가 편하다. 행복한 사람은 그녀뿐만이 아니다. 공부보다 미모에 훨씬 관심이 많은 이제 중학교 2학년인 딸아이는 얼마 전 나와 밥을 먹을 때 자신이 시골에서 왜 행복한지를 조목조목 열거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의 신선한 공기와 바람,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이 무수히 많은 점, 시골이라 모조리 공부 안 하는 좋은 친구들 등등. 시골에 살아 너무 좋은 점만 말한 것 같아 죄송스럽지만 이 시간 귀촌을 꿈꾸는 중장년들은 이런 꿈이라도 꿔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얼른 산에 나무하러 가야겠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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