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6일 남북 철도·도로 연결사업 착공식이 열린다. 착공식으로 쏠리는 시선들에는 기쁨과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남북의 끊어진 교통동맥을 이어 한반도를 온전한 유기체로 만드는 대역사라는 점에서 더없이 기쁜 일이다. 하지만 미국의 대북 제재로 실제 착공이 아닌 상징적 이벤트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측면에선 안타까움도 많다. 문재인 대통령은 “어떤 일을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착수식”이라고 했다. 마음은 착공으로 달려가지만, 제재 장벽 아래서 질주의 열망을 억제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그 현실은 북미관계 개선과 비핵화의 시급함을 다시금 일깨운다. 그러나 6·12 북미 정상회담 이후 줄곧 실무협상이 교착 상태를 벗어나지 못해 전망은 밝지 않다. 여기에는 미국의 합의 위반 책임이 크다.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등으로 구성된 6·12 합의는 내용과 형식 모두 합리적이다. 핵무기 개발 원인을 북미 간 적대에서 찾고, 양국의 관계 개선을 통해 비핵화를 실현하려는 상호주의 정신에 입각한 합의여서다. 하지만 미국은 합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6·12 회담 전의 ‘선(先) 비핵화’ 일방주의로 돌아서버렸다. 합의를 깬 것이나 다름없다. 이 때문에 상응조치를 요구하는 북한의 반발을 초래해 실무협상은 사실상 휴업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의 변화도 심상찮다. 그는 요즘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말을 자주 한다. 자신의 재선 성공을 위해 선거 전까지 북핵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하던 종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러면서 “비핵화가 이뤄질 때까지 대북 제재를 유지하겠다”며 압박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다.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인 ‘전략적 인내’를 연상케 한다.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는 북한에 대한 철저한 무시였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12년 이후 북핵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 전략적 인내는 실패한 비핵화 정책이다. 2016년 몽골 안보회의에 참석한 북한 외무성 관료는 “전략적 인내 정책이 북한으로 하여금 핵 억지력을 가질 수 있게 했다”고 털어놨다. 협상보다 제재에 치우치는 트럼프 대통령의 비핵화 협상 진정성은 의심받을 만하다.

‘선 비핵화’ 일방주의든, 협상 지연이든, 전략적 인내든 나쁜 정책이긴 마찬가지다. ‘선 비핵화’는 협상 상대방과의 갈등이 불가피하고, 나머지 두 정책은 비핵화에 역행한다는 점에서 사용해선 곤란하다. ‘선 비핵화’는 최근 북한의 반발을 불렀다. 비록 외무성 산하 미국연구소 정책연구실장의 담화이긴 하나, “조선반도 비핵화로 향한 길이 영원히 막히는 것과 같이 그 누구도 원치 않는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다”는 경고는 섬뜩하다. 북미 간의 30년 북핵 갈등사는 숱한 위기와 고난으로 점철돼 있다. 북미 정상은 그 흑역사가 더 지속되길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 4월 노동당 결정서에서 밝혔듯이 경제 발전에 총력을 집중해야 할 테고, 트럼프 대통령도 재선에 성공하려면 민생과 복지에 신경을 쏟아야 한다. 그런 만큼 북핵 갈등의 흑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게 바람직하다.

당면 최대 과제는 내년 1, 2월로 예정된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일이다. 한반도 비핵화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사건이다. 이 회담을 성사시키려면 북미 정상이 내년 신년사를 통해 서로 담대한 제안과 결단을 주고받는 ‘신년사 외교’가 필요하다. 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 조치’를 제시하길 바란다. 세계 최고 북핵 전문가인 지그프리드 헤커 스탠퍼드대 교수는 이와 관련해 영변 핵시설의 상징인 5메가와트 원자로를 폐기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북한의 이런 비핵화 조치들이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대로 정상화(새로운 북미관계)를 향한 미국의 조치들과 맞춰진다면 영변 활동에서 전체 핵프로그램까지 망라하는 단계적인 신고 프로세스에 북한이 돌입하게 하는데 필요한 신뢰가 구축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되돌릴 수 없는 체제보장 조치’로 김 위원장에게 화답해야 마땅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 스승’으로 불리는 리처드 하스 미외교협회 회장이 마침 좋은 조언을 내놓았다. 그는 “북한이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를 먼저 해야 대북 제재를 완화하겠다는 정책은 비현실적”이라며 “북미 양측이 동의한 최종 목적에 도달하기 전에 중간 목적을 세우고 제재, 외교, 경제적 보상이 적절히 섞인 단계적인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핵 전파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번질 것”이라고 우려하기도 했다. 두 전문가가 들려준 조언의 공통점은 상대 입장을 존중하는 상호주의의 견지다. 이는 6·12 합의의 근본정신이기도 하다.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는 이 정신의 실천 여부에 달렸다.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