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정리하는 즈음, 해외뉴스 중 유럽의 소식이 단연 눈길을 끈다. 유럽연합(EU)은 지역협력을 통해 시장의 단일화와 사회통합을 이끈 공동체로 인식돼 왔으나 최근에 명확한 변화가 감지된다.
우선 영국의 브렉시트 협상 소식이다. 영국과 EU, 양측은 어떠한 합의점도 도출하지 못한 채 협상 기한이 임박해옴에 따라 두려움이 짙어졌다. 2016년 6월 EU 탈퇴 국민투표 가결 후, 이듬해 3월 영국정부가 유럽이사회에 탈퇴 신청을 단행, 2년의 협상기한이 주어졌다. EU와 회원국들의 입장에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데 대해 데드라인까지 설정된 상황은 어쩌면 처음부터 결말이 예견돼 있었다. 협상종료 100일 앞둔 지난 19일 양측은 ‘노딜(no deal) 브렉시트’, 즉 협상되지 못한 채 탈퇴만이 처리될 위기를 현실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협상 기간 내내 영국 국내 여론은 분열됐고, 탈퇴를 주도했던 세력은 영국의 미래를 위한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했다.
애초 브렉시트는 어찌 결정됐던 것일까. 양극화와 경기후퇴로 사회불안과 불만이 누적되던 시기, 정치가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유럽회의주의, 즉 지역협력을 부정하는 데 노련하게 연결해가야할 방향을 제시했다. 이들은 일반시민이 막연하게 생각하던 지역연합을 이민 문제와 분담금이라는 명확한 실체와 브렉시트라는 슬로건으로 귀결시켰다. 탈퇴 가결 직후 영국 국민들은 자신의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제서야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국민투표 당일 영국인들이 구글에서 가장 많이 검색한 문장 중 하나는 ‘EU가 무엇인가’였다는 사례가 이를 방증한다.
브렉시트와 같이 사회문제와 정치세력이 연계되는 현상이 최근까지 다양한 사회현상의 일반화된 전형이었다면, 이제 또 다른 유형의 새로운 현상이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다. 지난 10월부터 본격화한 프랑스 내 ‘노란 조끼 시위’는 현재까지 격화되고 있으며 유럽지역 전역으로 확산하고 있다.
프랑스의 시위는 유류세 인상에서 비롯됐다. 시위대를 이끄는 조직적 세력도 없는 상황에서 시위가 쉬이 끝날 것이란 예측은 빗나갔다.
운전자의 필수품인 노란 조끼는 누구나의 시위 도구가 되었으며, 유류세 인상 반대라는 단순 이슈는 양극화와 불평등에 처한 수많은 서민을 결집시키는 데 충분했다. 이들의 시위는 SNS를 통해 진행됐고, 정치적 이슈와의 연계를 지양했다. 일부 폭력시위로 문화재 훼손 등의 사태까지 벌어졌음에도 일반 민중의 지지가 이어지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노란 조끼 시위는 자신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가시적이고 명확한 이슈에 대한 개인의 판단과 집중 그리고 온라인 연대라는 보편화된 도구로 확산됐다. 결국 프랑스의 노란 조끼들은 지난주 마크롱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를 통해 유류세 인상 철회를 끌어냈고, 새로운 저항운동은 각국이 처한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이슈에 대해 ‘노란 조끼’형 시위로 번져나가고 있다. 헝가리의 노동법 개정안 통과 반대, 벨기에의 ‘유엔이주협약’ 참여 반발 등 특정 이슈를 반대하며 온라인에서 소극적으로 저항하던 민중은 새로운 형태의 직접민주주의 행사를 시작했다.
전 세계적으로 확산돼 만연한 불평등과 격차 문제는 이제 일반 대중에게 가장 명확한 슬로건이 됐다. 이들은 듣기에도 모호한 이론으로 자신들의 문제가 해석되는 것에 관심이 없으며, 진보도 보수도 양측을 적절히 버무린 제3의 길도 이를 해결해줄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정치는 여야를 막론하고 기득권이 되어 비슷한 주장을 서로 다른 표현으로 싸우고 있다. 20세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이데올로기 경쟁에서 승리하며 다음 세기로 이어졌지만, 불평등과 격차의 만연한 문제는 이제 정치나 특정 세력이 지시하는 손가락 끝을 벗어나고자 한다.
최근 교수신문은 ‘임중도원(任重道遠)’을 올해의 사자성어로 발표했다.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 현재의 시국 상황을 빼닮았다. 정치권은 사사건건 이전투구를 하고 있으나 시민은 유럽과 같이 변화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정치나 이념으로 가득해 보이지만 서민들은 이들에 기대지 않고 심각한 양극화 사회에 처해 각자도생의 길을 모색해 왔다. 우리의 수많은 짐 중 불평등과 양극화가 다양한 이슈와 연계돼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한국사회 내 잠재된 노란조끼에 대한 해법이 제시되는 새해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동아대 국제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