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학생들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지원하는 ‘지역특화 청년무역전문가 양성사업단’의 해외시장조사사업의 일환이었다. 마지막 날 인근 항일유적지를 찾았다. 그때 가이드의 설명 중 최재형(1860~1920) 선생의 이름이 와닿았다. 이력이 절절하고 비통해 감동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아니, 그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에게 조국은 무엇이었습니까?”라고.
선생은 1860년대 노비였던 아버지를 따라 연해주로 건너간 유랑민이었다. 이는 ‘조국’이 결코 그에게 ‘자애로운 아버지의 나라’가 아니었을 거라 짐작게 한다. 오히려 러시아에서 글을 배웠고, 그곳에서 만난 선장 부부 도움으로 근대교육을 받았다. 이후 사업가로 변신, 조선인의 권익을 위해 힘쓰다 조선인 자치 마을의 수장인 도헌으로 추대됐다. 그는 특히 교육사업에 힘썼으며, 동포사업가들을 규합하고 자신의 러시아 인적 네트워크를 이용해 연해주 러시아군의 물자 납품권을 따내 조선인 사회의 부를 크게 증진시켰다.
1907년은 그의 생애에 분기점이 되는 해였다. 조선군대가 해산돼 일자리를 잃은 군인들이 국경을 넘어 몰려들자 이범윤과 함께 의병을 조직했다. 그는 의병을 위한 비용을 담당하며, 실제 그들과 함께 국내 진공작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 역시 그의 재정 지원과 치밀한 준비가 없었으면 성공하기 어려웠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군대 설립과 함께 군인 양성의 목표를 실천했다. 이 ‘광복군’을 후에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가 계승하게 된다.
일제 침략이 가속되자 1920년 4월 한인의병을 모아 연해주까지 진격한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이다 체포됐다. 그가 처형된 직후 전개된 봉오동·청산리 전투 역시 그가 주축이 돼 구입한 소련제 기관총이 없었다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상해임시정부가 그를 초대 재무청장으로 추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국독립투쟁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재정적 역할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붓고 세상을 떠나기 전 몇 해는 조카의 도움으로 생활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조국을 위한 선생의 평생에 걸친 헌신을 고려하면 우리 역사가 친러 개화파라 할 수 있는 선생에게 친미 개화파인 서재필이나 친일 개화파인 유길준에 비해 합당한 대접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박노자는 ‘영웅 최재형의 잊혀진 전설’에서 러시아가 적국이 되면서 자료 접근이 어려웠다는 사실과 함께 그의 신분상의 위치를 그 이유로 든다. 그의 신분을 논할 때 피해갈 수 없는 한 인물이 있다. 이범윤은 간도관리사였으나 연해주로 건너와 최재형과 합류한 이로 의병활동에 공을 세운 사람이다. 첫 만남에서 그는 고종이 하사한 마패를 보이며 자신이 국왕의 대리인임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 양반가 사대부 관료로서의 자의식이 강했던 것 같다. 전술을 짤 때 의견 충돌이 있을 때 이범윤은 최재형의 천출 신분을 들어 그를 모욕한다. 조선의 유교적 신분관에 매어 있던 그로서는 최재형이 자신을 도와 의병활동에 막대한 재산을 제공하고 있었지만 노비로서의 그의 과거를 쉽게 잊을 수 없었던 듯하다. 갈등은 격화돼 이범윤 측에서 최재형 휘하를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1909년에는 아예 최재형을 저격하기에 이른다. 총 3발을 맞고 겨우 목숨을 건진 최재형은 이범윤과 결별한다. 두 사람 모두 ‘조국’을 위해 삶 전체를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신분 차이 앞에선 힘을 모으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이는 두 사람이 말하는 ‘조국’이 그 이름은 같지만 사실 다른 존재란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이범윤은 유교적 신분질서가 유지되는 양반의 나라를 꿈꾸었으리라. 양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민초의 피와 천출의 재산을 요구하고 있는 자기모순을 그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최재형 선생의 조국은 그와 달랐을 것이다. 노비의 자식도 사람대접 받는 세상이 아니었겠는가. 그렇다면 “당신에게 조국은 무엇이었습니까?”라는 나의 물음은 답을 찾은 셈이다.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 현재, 이렇게 묻고 싶다. 우리는 선생이 꿈꾸던 조국을 실현하고 있는가.
한국해양대 국제무역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