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돼지해’로 불리는 기해년의 설이 2주 앞으로 다가왔다. 나라든 개인이든 ‘설 밥상머리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가족친지와 새해 덕담을 나누다 보면 ‘지난해에는 어떠했고, 올해는 어떠할 것 같다’는 말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정치인들이 ‘설 민심’에 민감한 이유이기도 하다.

올 설 민심이 그리 좋을 것 같지는 않다. 경제가 어렵다는 말이 넘치고, 청년 취업난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이번 설에는 ‘뿌리’와 ‘희망’이 덕담의 한 소재가 됐으면 한다. 온갖 역경을 넘어 오늘에 이른 선조의 지혜와 불굴의 의지를 되새기고 우리 앞의 숱한 도전을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나누었으면 한다. 단재 신채호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역사에서 지혜를 찾으면 희망찬 미래를 만들 수 있다’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오늘을 일궈온 한 주역인 경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겠다. 특히 부산 울산 경남지역민들은 ‘경남예찬’을 상다리가 휘도록 주고받았으면 한다. 경남은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에서 한반도를 지켜낸 역사를 갖고 있다. 경남은 민주화와 산업화의 물줄기를 이끈 현대사의 주역이기도 하다. 경남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부산(1963년)과 울산(1997년)이라는 두 개 광역시를 분가시킨 종가다. 경남과 부산 울산은 인구 800만 명의 광역경제권으로 발전했다.

하나씩 짚어보자. 임진왜란(1592~1598년) 3대첩(한산도·행주·진주성대첩) 중 2대첩이 경남에서 일군 것이다. 경남 옥포는 조선수군이 왜군으로부터 바다를 지켜낸 첫 전장(옥포해전)이었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경남(경상우도)에는 ‘선비의 실천적 삶’을 강조한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의 정신이 넘쳤다.

‘홍의장군’으로 불리는 의병장 곽재우를 비롯해 100명이 넘는 남명의 후학은 선생의 가르침대로 선비의 책임을 실천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과 김시민 장군의 진주성대첩은 ‘불의에 눈 감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남명 선생의 가르침과 경남인이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한국전쟁에서 경남은 대반격을 위한 보루였다. 경남도의 수부도시인 부산시는 전시수도였고, 거제는 17만 명이 넘는 포로를 수용했다. 피란민들의 마지막 도착지도 경남이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경남을 빼놓고 논하기 어렵다. 1960년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맞서 일어선 마산 3·15의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1979년 부마항쟁은 유신체제의 종식을 가져왔다. 부산과 경남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핵심주체였다. 10년 뒤 광역시로 분가한 울산에서도 노동세력을 중심으로 한 투쟁이 뜨거웠다. 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열사의 고향이 부산이라는 점도 영향을 끼쳤지만, 군부독재라는 불의에 맞서는 경남인의 기질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경남의 산업화 과정은 곧 한국이 빈곤에서 탈출하는 여정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경남도의 부산·마산·진주시는 신발 섬유 목재 화학 등 소비재 산업으로 한국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했다. 1962년 1월 울산이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되고, 1973년 창원공단과 거제조선공단 개발이 시작되면서 경남은 ‘한국의 산업심장부’로 불렸다. 이 과정에서 경남도민들은 황금어장과 논밭을 내놓고, 공해와 극한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울산 공업탑에 새겨진 1962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울산 공업센터 기공식 치사문 중 ‘(전략)공업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나가는 그날엔, 국가와 민족의 희망과 발전이 눈앞에 도래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후략)’라는 표현은 경남도민의 희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후 중화학단지로 바뀐 울산은 ‘공해도시’라는 오명을 40년 만에 털어냈다.

진주(1896~1925년)에서 부산(1925~1983년)을 거쳐 창원으로 도청을 옮겨가며 도전과 시련을 이겨내고 부산과 울산을 키우고 한국을 살찌운 경남의 역사는 용기와 희망의 에너지가 될 것이다. 부산 큰아들, 울산 작은딸이 경남 아버지와 마주 앉는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서울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