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남미 여행을 하면서 4차 산업혁명의 방향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유적만 남은 페루의 잃어버린 공중도시 마추픽추 현장을 보면서 원주민 조상의 영령이 되살아나듯 슬픔이 가슴 깊숙이 밀려 왔다. 그날은 비가 내려 나를 더욱 슬프게 했다. 일제 36년간 지배를 받았던 우리이기에 더욱 그랬다.
페루는 한때 잉카문명의 위대한 문화를 가진 민족이었지만 스페인의 300년 넘는 지배로 원주민들의 영성문화는 유적만 남아 있었다. 남미 대부분의 나라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여전히 주류세력은 백인이다.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것만 봐도 정신적 문화적 독립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이렇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영성문화가 기술문명에 패했기 때문이다. ‘총·균·쇠’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재래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기술의 열악함이 국가와 인종의 소멸을 가져왔다고 증명해 보였다. 약소국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면 기술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은 생산력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과학기술 개발에 성공한 나라는 국민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며, 이들 나라가 또한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기술을 획득한 나라는 정의롭고 평화로울까. 현실은 정반대다. 이들 나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기술의 윤리적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중지능을 제창한 하버드대의 가드너 교수는 “과학기술이 희망이고 축복인 동시에 재앙이고 저주이기도 하다”고 역설했다. 유전공학, 인공지능, 나노기술이 천국을 건설할 수도 있지만 지옥도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끊임없이 물질문명을 발전시켜왔지만 지구와 자연환경에 끼친 부정적 영향도 엄청나다. 이를 두고 유발 하라리 교수는 저서 ‘사피엔스’에서 ‘현명한 선택을 할지 여부는 우리 모두의 손에 달려 있다’고 했다. 인간이 현명한 선택을 한다면 그 혜택은 무한하겠지만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면 인류의 멸종이라는 엄청난 비용을 치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태인의 무차별 대량 학살,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누출 사태가 단적인 예다. 물론 이러한 위험이 있다고 하여 생활의 편리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4차 산업혁명을 거부하자는 것은 아니다. 4차 산업혁명시대는 이미 우리 가까이에 와 있기에 거역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을 수용하면서도 이러한 기술혁명의 반윤리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것은 과학기술교육과 함께 인문교양교육을 동시에 실시하는 것이다.
단순히 이를 병렬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독자성을 가지면서도 융·복합적으로 가르치는 ‘통섭교육’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동안 세계의 교육개혁을 주도한 STEM(과학·기술·공학·수학)에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이 들어 있지 않다.
이제는 STEM을 넘어 예술(Arts) 및 인문교양(Liberal Arts)을 포함한 STEAM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기술적 창의성을 넘어 사회적 창의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사회적 자본(사회정의, 신뢰, 상호존중 등)이 취약한 사회에서 기술 성장은 사회적 갈등과 빈부 격차를 더욱 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기술의 발달이 차별과 격차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편리하고 풍요로우며 행복한 삶을 보장해 줄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허드렛일은 로봇이나 컴퓨터에 맡기고 더 많은 시간을 문화생활이나 사회적 활동을 위해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과학기술교육을 충실히 하면서도 그 기술이 다른 나라를 정복하거나 전쟁을 일으키는 도구가 되지 않도록 하는 평화교육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하여 4차 산업혁명을 미래교육으로의 패러다임 대전환을 위한 촉진자로 활용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권과 생태 의식이 결여된 경제성장만을 위한 국가주의 시대나 100여 년 전 기술적 근대화를 앞세웠던 ‘개화파’와 영성적 근대화를 내세웠던 ‘개벽파’의 극한적 대립 상황으로 되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것은 곧 일제 식민화로 귀결되었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부산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