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통 큰 결단이 필요하다. 기원전 334년, 프리기아(현 터키)에서 얽히고설킨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잘라 아시아를 정복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과시한 알렉산더 대왕처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교착 상태에 빠진 북미 협상의 돌파구를 마련하려면 이 같은 결단이 긴요하다고 판단한 것일까.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이 김 위원장의 비핵화 결단을 고르디우스의 매듭에 비유하며 주민들에게 공식적으로 알리고 나서 눈길을 끈다.
화제의 기사는 지난 13일 ‘김정은 장군 평화의 새 역사를 쓰다’는 제목의 재일동포 기고문이다. 기고문은 김 위원장의 비핵화 결단을 소상히 소개했다. 특히 김 위원장이 올해 신년사에서 천명한 ‘더는 핵무기를 만들지도, 시험하지도, 사용하지도, 전파하지도 않겠다’는 4불 방침에 대해 “평화를 향한 현재의 발걸음에서 후퇴하지도, 되돌아가지도 않겠다는 굳건한 각오”라고 평가했다. 지난해 4월 노동당 전원회의 때 ‘핵·경제 병진 노선’ 대신 채택한 ‘경제 총력 집중 노선’ 등을 비핵화 결단 사례로 꼽기도 했다.
오는 27, 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는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김 위원장의 비핵화 결단이 당 기관지에 소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핵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풍계리 핵실험장, 동창리 미사일 시험장, 영변 핵시설 폐기 등 김 위원장이 앞서 약속한 비핵화 조치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을 여지도 다분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뿐만이 아니다. 희망적인 신호는 미국에서도 발신되고 있다. 지난 13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제재 완화의 대가로 좋은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 우리의 전적인 의도”라며 ‘제재 완화’를 처음으로 언급한 게 그 하나다. 완전한 비핵화 전까진 결코 제재의 고삐를 늦추지 않겠다는 종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지난달 말 대북 실무협상 대표인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우리는 ‘당신(북한)이 모든 걸 다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의 변화다.
줄곧 ‘선 비핵화’ 입장을 고수해온 ‘슈퍼 매파’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의 변화는 더 주목된다. 그는 “우리가 북한으로부터 필요로 하는 것은 핵무기를 포기하는 전략적 결단에 대한 의미 있는 신호”라며 “이러한 비핵화가 이뤄질 때 제재 해제를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북한이 불가역적 수준의 비핵화 조치를 단행하면 제재 해제를 포함한 상응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북미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낙관은 금물이다. 국내외에 북한 비핵화 회의론이 팽배해지고 있어서다. 미국 내 회의론은 야당 중심에서 정부기관으로 확산되는 양상이어서 자못 심각하다. 지난 12일 필립 데이비슨 인도·태평양사령관은 상원 청문회에서 “북한이 모든 핵무기와 생산능력을 포기할 것 같지는 않다”며 “미국과 국제사회의 양보를 대가로 부분적인 비핵화 협상을 모색할 것으로 본다”고 했다. 지난달 말 국가정보국(DNI)과 중앙정보국(CIA) 등 정보 당국의 수장들도 의회에서 같은 입장을 밝혔다. 군과 정보 당국 책임자들의 회의론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불신을 키워 북미 협상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개연성이 높다.
이보다 더 우려스러운 건 우리 안의 북한 비핵화 회의론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만 제거하고 핵무기는 동결하는 수준에서 비핵화 협상을 마무리할 것이라는 주장인데, 명확한 근거도 없이 확신으로 굳어지면서 핵무기 보유론으로 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핵 보유는 일본에 핵 무장의 빌미를 제공하는 등 동북아를 ‘핵 대결장’으로 만들 공산이 크다. 핵확산금지조약을 거스르는 까닭에 국제적 제재와 고립을 감수해야 하는 건 물론이다. 북핵을 규탄하면서 핵을 보유하겠다니, 이치와 논리에 어긋나는 궤변이나 다름없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의 관건은 담대한 결단과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가짐이다. ‘선 비핵화’ 일방주의에서 벗어나 비핵화와 관계 정상화, 평화체제 구축 등 세 가지 과제를 동시에 추진하기로 했던 1차 정상회담과 같은 패러다임 전환이 그 본보기다.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선 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현할 합리적인 로드맵을 마련해야 한다. 평화 로드맵이다.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평화를 일군 베트남만큼 이 로드맵을 짜기에 적합한 장소가 없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잘라낸 알렉산더 대왕은 “아시아를 정복할 사람은 바로 나”라고 외쳤다. 이제 패러다임을 전환한 북미 정상이 외칠 차례다. “북핵 문제를 해결할 평화의 사도는 바로 우리”라고.
논설위원 yis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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