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제6회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중에 ‘톰과 제시카’라는 영국 영화가 있었다. 주인공인 10대 소년과 소녀는 시종 어둡고 무표정한 얼굴로 의미 없는 일탈에 몰두하는데 그 이유가 당시로선 꽤 충격적이었다. 소녀는 이웃에 사는 자기 학교 교사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소년은 홀아비인 친부로부터 매일 밤 성적 학대를 겪고 있었던 것이다. 소녀의 아픔을 알게 된 소년은 가해자를 살해하고 저도 죽는다. 이 영화적 허구를 뛰어넘는 현실이 일상적으로 존재함을 알게 된 건 얼마 후 일선 경찰서를 출입하면서부터다. 성범죄 피해자인 여학생을 사건담당 경찰이 성폭행하는 일이 벌어지질 않나, 친딸에게 몹쓸 짓을 한 혐의로 형사계에 붙잡혀와선 반성없이 살기 등등하던 남자의 짐승같은 눈빛도 잊히지 않는다.

여자 아이들이 난생처음 또래와 며칠간의 외박(?) 기회를 갖는 건 수학여행 때일 것이다. 수십 명이 한방에 모여앉아 밤새도록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속 깊이 감춰뒀던 상처가 하나 둘 소환된다. 놀라운 것은 그 경험의 보편성과 광범위함이다. 2차 성징이 뚜렷해질 무렵 길거리에서 마주친 아저씨의 야릇한 눈빛이나 버스 안에서의 불쾌한 접촉, 수업시간 농담을 가장한 교사의 음담패설 쯤은 약과다. 가해자가 친·인척의 범위로 들어서면 귀를 막고 싶어진다. 미성년 때 성희롱이나 성폭행의 트라우마는 머리가 아니라 세포에 새겨진다고 한다. 그땐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이 과정은 소녀들이 어렵사리 실행한 최초의 ‘#미투(#MeToo, 나도 당했다 혹은 나도 말한다)’가 아니었나 싶다.

작년 초 서지현 씨가 평검사 시절 상급자인 안태근 전 검사장으로부터 장례식장에서 성희롱을 당했고 이를 문제 삼자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일반인들이 사건 내용보다 놀랐던 건 피해자의 신분이었다. 현직 검사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저런 일을 겪는가라는 참담함이랄까. 성범죄의 뿌리가 곳곳에 깊이 박힌 우리 사회의 민낯을 확인했던 것이다. 서 검사의 미투 이후 수많은 미투가 봇물처럼 쏟아졌다. 최영미 시인은 자작시 ‘괴물’을 통해 노벨문학상 후보까지 거론되던 시인 고은의 만행을 폭로했다.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 사건도 터졌다. 결정타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였다. 정치계 교육계 종교계 체육계 등 미투가 없는 영역이 없을 정도였다. 이들이 각자 죗값을 받았으니 지난 1년간의 미투는 일정 부분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인기에 취해 여성을 성적 노리개쯤으로 알고 날뛴 연예인 정준영의 광기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치자. 그러나 3년 전 똑같은 스캔들에서 피해여성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그를 복귀시킨 게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지상파 방송사다. 더구나 그 스캔들이 무혐의 처분되는 과정에 경찰과의 유착 의혹도 터져나오고 있다. 이게 우리 사회다.

현재까지 미투 관련 법안이 국회에 발의된 것은 최소 145건이라고 한다. 하지만 본회의를 통과한 법안은 24.1%인 35건에 그친다. 관심은 미투가 쏟아질 때 반짝 솟았다가 곧 사그라든다. 시간이 지나면서 미투는 빚 못 받았다는 ‘빚투’, 매 맞았다는 ‘매투’ 등 말장난과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부각되는 쪽도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미투에도 여전히 성역이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권력에 짓눌려 말 못하고 피눈물만 흘리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고 본다. 어디선가 끈적한 농담과 ‘시선 강간’은 집요하게 이어지고 있다. 서 검사 정도의 여성도 미투와 미투 이후의 고통을 “죽음과도 같았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을 정도다.

17세기까지 서구에서는 여성과 남성에 생물학적 구분이 없었다. 이른바 ‘남녀동형설’이다. 여성의 자궁은 남성의 음낭과 음경을 안으로 뒤집은 것이며, 완전한 인간(man)은 오로지 남성(man)뿐이라는 인식이다. 눈으로 뻔히 관찰되는 여성의 생물학적 특징이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데 200년 이상 걸렸다.

요즘 일부 20대 남성 사이에는 미투 운동에 대한 반대 여론이 일고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캡틴 마블’의 주인공 캐릭터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관람 거부 운동을 벌이는 젊은 남성들이 있다는 보도도 있다. 하지만 100년 전 영국 여성들의 참정권 쟁취 투쟁이 결국은 여성뿐 아니라 부동산이 없어 투표권도 없었던 노동자 계층 남성의 권리도 신장하는 데 기여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범죄 피해자=여성’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피해자 상당수가 남성이고 그 절반 이상이 남자 아이 또는 남자 청소년이라는 사실은 자주 잊힌다. 피해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는 ‘성인지감수성’이란 단어에서 여성은 ‘남성’ 혹은 ‘사람’이란 단어로도 치환 가능하다. 미투의 진정한 의미가 지금껏 우리가 외면해온 모든 불공정에 대한 자성과 비판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거기에 여자 남자 논쟁이 끼어들 틈은 없다.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