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혈관(血管)속에 시내처럼 흘러 / 돌,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 /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 삼동(三冬)을 참아온 나는 /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윤동주 시인의 시 ‘봄’의 일부다. 물이 흐르는 시내 가까운 언덕에 개나리와 진달래, 배추꽃이 피어나는 것을 노래했다. 그리고 그 풍경과 마찬가지로 한겨울을 견뎌온 자신의 몸에도 핏줄에도 봄의 시내가 흘러 풀포기처럼 풀꽃처럼 생명의 생기가 활짝 피어난다고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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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서상균 |
동시 창작에서도 남다른 재능을 보인 윤동주 시인은 동시 ‘봄’에서는 이렇게 썼다. ‘우리 애기는 / 아래발치에서 코올코올, // 고양이는 / 부뜨막에서 가릉가릉, // 애기 바람이 / 나무가지에서 소올소올, // 아저씨 햇님이 / 하늘 한가운데서 째앵째앵.’
삼월에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다시 펼쳐 읽는다. 영화 ‘동주’가 재조명되고 있고, 윤동주 시인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과 애정도 어느 때보다 뜨겁다. 지난달 16일은 윤동주 시인이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지 74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윤동주 시인이 한때 수학했던 도쿄 릿교대 등에서 시인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열렸다는 소식이 있었다.
최근 우연히 일본 와세다대 명예교수인 오무라 마스오가 쓴 ‘윤동주 시인을 기리며’라는 글을 읽었다. 오무라 마스오 교수는 와세다대에서 중국어 및 한국어 담당 교수로 재직했다. 글에서 그는 윤동주 시인의 묘지를 찾아냈던 1985년 당시를 회고했다. 1984년 여름에 윤동주 시인의 동생 윤일주를 만났을 때 윤동주 시인의 묘가 용정의 옛 동산교회 묘지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5월 14일 어렵게 수소문해서 찾아갔더니 옛 동산교회 묘지는 급경사의 밭과 엉성한 숲, 쓰러진 묘비들이 흩어져 있었고, 그날은 묘 둘레에 솟은 큰 풀포기들을 뽑고 돌들을 치우고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5월 19일에 다시 찾아가 한국식 제사를 지냈다. 제사상에는 두만강에서 잡은 송어, 조선산 명태 등을 올렸다고 했다.
오무라 마스오 교수는 윤동주 시인의 동생인 일주 광주 두 아우의 이름으로 세워진 묘비의 비문도 소개했다. ‘학해(學海)에 파도가 일어 신체의 자유를 잃고 형설의 생애는 농조(籠鳥)의 환경으로 바뀌고 이에 더해 병이 악화, 1945년 2월 16일 장서(長逝)하다. 나이 29세. 당세에 쓰일 인재(人才). 시가 마침내 사회에 울려 퍼지려는데 오히려 춘풍무정. 열매를 맺지 못하니 아아 애석하고나.’ 오무라 마스오 교수는 “현재 일본에서 한국의 근대문학을 연구하는 전문가가 2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자신이 윤동주 시인의 작품과 생애를 진정 존중하고 애틋해하는 이유는 윤동주 시인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에 준엄한 민족적 저항정신과 기독교적 희생정신에 입각한 인간애 넘치는 서정시를 남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윤동주 시인은 1945년 2월 16일에 별세했다. 별세한 지 열흘이 지나서야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는 전보가 고향집에 전달됐다. 아버지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윤동주 시인의 시신을 수습하러 일본으로 건너갔고, 3월 6일 문익환 목사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의 집도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묘비석은 6월 14일 세워졌다. 묘비의 비문은 명동학교 학감으로 윤동주 시인의 스승이었던 김석관 선생이 지었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해여서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뜻이 좀 더 각별하다. 그러나 윤동주 시인을 추모하는 것은 그가 스물아홉의 나이에 이국의 감옥에서 작고한 민족 시인이라는 사실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부끄러움과 성찰의 시학을 간과할 수 없는 까닭이다.
문학평론가 이남호는 그의 평글 ‘문학에는 무엇이 필요한가’에서 문학의 본질이 되는 몇 가지를 열거한다. 그는 세계와 사물의 숨은 질서와 내밀한 운동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고요함의 공간과 내면성, 후의(厚意) 혹은 관용이라고 불러도 좋을 너그러움, 연민의 마음이라고 제시한다. 특히 내면성의 견고함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시인으로 윤동주 시인을 꼽는다. 윤동주 시인은 내면성이 아주 강한 시인이고, 그의 시는 ‘한 순결한 시인의 내면 기록’이면서 참회와 반성을 통해 자기 정직성과 높은 도덕성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아닌 게 아니라 윤동주 시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시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라고 노래했고, 시 ‘참회록’에서는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라고 노래했다. 식민지 현실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이러한 강한 내면성이 윤동주 시인의 시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는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세 곳 있다. 윤동주 시인이 유학했던 교토 도시샤대와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하숙집 터, 그리고 우지강변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도시샤대에는 정지용 시인의 시비도 있다. 정지용도 이 대학에서 수학했다. 윤동주 시인은 우지강변으로 친구들과 소풍을 갔고 거기서 사진을 찍었는데, 1943년 7월 14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면서 그때 찍은 사진은 안타깝게도 생애 마지막 사진으로 남게 되었다.
윤동주 시인은 시를 짓는 일 자체에 있어서도 결벽하고 엄격했다. 그의 연희전문 동문 강처중은 윤동주 시인의 유고 시집 발문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 데 대해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해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 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않았다.’
윤동주 시인의 시와 정신은 오늘날에도 빛난다. 자기반성을 통해 염결한 영혼에 도달하려 애쓴 사람이었다. 그의 시는 당당하고 위축되지 않는다. 윤동주 시인을 생각하는 봄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