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에게 부산살이는 아직도 관광객 모드다. 강산이 두 번 넘게 바뀌고서 다시 돌아온 부산인데 바다 위를 관통하는 광안대교 같은 풍광은 아직도 신기하기만 하다. 부산 시내를 운전하다 예전 모습을 간직한 옛 건물과 도로를 볼 때면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며 혼자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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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밤에 거문고를 타고 있는 선비의 풍류를 그린 이경윤(1545~1611)의 월하탄금도(月下彈琴圖). |
이런 감상도 잠시, 이내 뒷차의 경적에 정신이 번쩍 들기가 일쑤다. 20년 운전 경력이 초라할 만큼 부산 시내운전은 여전히 긴장된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교통 안전캠페인 ‘깜빡이 단디’ ‘건널목 단디’라는 슬로건이 무색할 만큼 도로 위 많은 운전자는 상대방에게 ‘빨리빨리’를 재촉한다. 더군다나 우리는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과 자신에게 필요한 감성지능을 가질 여유조차 없이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시대의 도래와 함께 빠른 시대 변화에 순응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처럼 빠름을 추구하며 살게 되었는가. 원래 우리는 여유로움과 느림의 미학을 가진 민족이었다. 그러한 민족성은 음악에도 잘 나타나 조선 시대 선비에게 음악은 교양이자 덕목이며 수신의 학문이었다. 조선 시대 궁중음악과 선비들이 향유했던 정악(正樂) 곡들은 음악이 빨라지면 나라가 혼란하게 된다 하여 대부분 느린 음악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중 영조실록 127권 여민락(與民樂)에는 ‘예전에는 동궐(東闕)과 서궐(西闕)을 왕래하고서야 일장(一章)이 끝난다 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임금의 거둥에는 항상 음악이 따랐고, 이에 사용된 여민락은 동쪽 궁궐과 서쪽 궁궐을 오고가는 동안 한 개의 악장만 연주될 정도로 매우 느린 음악이었다.
정악 중 가장 느린 음악인 수제천이나 영산회상 중 상령산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한 박의 길이가 3초에 가까운 느린 음악을 수십 명이 연주하는 동안 서양음악의 지휘자처럼 박자를 저어주는 사람조차 없다. 이런 연주가 가능할 수 있는 비밀은 호흡에 있다. 서양의 메트로놈의 박자 기준이 사람의 심장박동에 있다면 한국은 들숨과 날숨의 일식(一息)에 그 기준을 둔다. 서양의 보통빠르기인 모데라토가 편안한 심장박동에 근거한 것이라면 우리의 편안한 호흡 주기는 그보다 3배 정도 느리다. 빠른 비트 음악을 들으면 흥분하게 되는 것과 반대로 정악을 들었을 때 몸과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은 호흡으로 연주하는 음악에 자연스럽게 몸이 맞춰지면서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옛날 좌금우서(左琴右書)라 하여 글을 읽다 잡생각이 나면 선비들은 거문고를 타며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음악은 정신과 마음의 예술이며 이를 수신의 덕목으로 삼았던 옛 조상들처럼 바쁜 생활 속에 음악을 통해 호흡을 한번 가다듬는 여유를 가져보는 건 어떨까. 소리연구회 소리숲 대표·음악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