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일에는 필연과 우연이 겹쳐 하루하루의 역사가 됩니다. 올해가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난해 7월 경남여자고등학교 역사관이 한 묶음의 소중한 자료를 부산박물관으로 기증하면서 우리는 오랜 시간 역사 속에서 비켜 서 있던 한 독립운동가의 활약상을 처음으로 밝혀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자료들은 유럽의 중심도시 파리에서 활약한 부산 출신 독립운동가인 서영해 선생과 관련된 유물 695점입니다. 선생이 프랑스에 도착한 1920년부터 1948년까지의 활동과 관련된 증명서류, 임시정부 요인들과 주고받은 서신과 통신문, 각종 저술, 등이었습니다. 이를 부인이셨던 황순조 전 경남여고 교장께서 보관하시다가 당시 국어교사였던 류영남 선생님께 맡기셨고, 30여 년이 지나 경남여고역사관에 기증되었고 다시 부산박물관으로 오게 됐습니다. 이 자료의 정리분석에만 6개월이 걸려 올해 1월 7일에야 기증서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부산박물관에서는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인 4월 11일에 맞춰 독립운동가, 문필가, 언론인, 그리고 작가로서 프랑스에서 활약한 최초의 한국인이었던 서영해 선생을 기리는 특별전시회를 개최합니다. 서영해 선생의 힘 있는 말과 글은 독립운동의 불모지 유럽에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가 알린 식민지 조국의 참혹한 현실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한국을 상상하게 하고, 무지의 깊은 잠에서 깨어날 수 있게 했습니다.
서 선생은 1937년 파리에서 오스트리아 출신 유학생 엘리자베스 C 브라우어(엘리자)를 만나 결혼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만남은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1939년 9월 2차 세계대전 발발 등으로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생이별로 귀결됩니다. 임신한 엘리자가 고향 빈으로 돌아가 아들 ‘스테판 칼 알로이스 솔가시 서(1939~2013)’를 낳은 때가 1939년 9월 20일이었습니다. 나치에 합병된 오스트리아에 서 선생은 갈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1940년 독일군의 파리 점령과 함께 프랑스에서 3년여간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1945년 5월 7일 독일 항복과 함께 유럽에 평화가 찾아왔지만 이 둘은 끝내 재결합 하지 못했습니다. 현재 빈에는 서 선생의 두 손녀 수지와 스테파니가 살고 있습니다. 수지는 할아버지부터 3대에 이르는 가족사를 찾기 위해 2017년 늦가을 한국을 찾아왔고, 오는 11일 할아버지의 유품을 보기위해 우리 박물관을 방문합니다.
서 선생은 1902년 부산 초량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던 아버지 서석주와 어머니 김채봉의 8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중국인 거류지 청관(淸官)에 자주 드나들며 새로운 문화에 일찍 눈을 떴습니다. 중국말도 쉽게 익혔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늦은 나이인 15세에 부산공립보통학교(현 부산 봉래초등학교)에 입학해 1918년 졸업했습니다. 그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18세의 나이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서 대략 1년 반을 지낸 후 1920년 파리를 향해 떠났습니다. 임시정부 파리위원회의 주선으로 11년의 정규교육과정을 6년 만에 마친 후 소르본느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경제적 후원자이셨던 부친의 사망으로 중퇴하고 이후 세계 최초의 언론학교인 파리고등언론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1929년 7월 파리에서 열린 제2회 반제국주의세계대회에 참가한 후 서 선생은 본격적인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습니다. 당시 그는 유창한 프랑스어로 한국 문제를 의제의 중심으로 부각시키며 맹활약 했습니다. 그해 9월 파리 시내 자신의 숙소에 고려통신사를 설립하고 상하이 임시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각국 언론사에 일제의 한반도 강탈과 잔학한 만행들을 알려나갔습니다. 1932년 윤봉길 의거와 도산 안창호 체포 등도 모두 고려통신사를 통해 유럽 신문에 소개되었습니다. 또한 유럽에 한국 문화를 깊이 있게 소개하기 위한 활동을 고심했습니다. 그 결과, 1929년 ‘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을 펴내고, 1933년 ‘만주의 한국인들’과 1934년 ‘거울, 불행의 원인’을 고려통신사를 통해 간행했습니다. 그에게 임시정부는 1934년 4월 2일에 주프랑스 외무위원, 1936년 3월 8일에는 주프랑스 특파위원의 임무를 맡깁니다. 하지만 1만여 명의 한인 사회를 이루고 있던 미주와 달리 유럽에서 선생은 홀로 외로이 독립운동을 펼쳐야 했습니다.
서영해 선생은 역사 속에서 오랜 시간 비켜 서 있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선생의 삶과 헌신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역사 속에 새긴 그의 깊고 큰 발자취를 다시금 불러내 보고자 합니다. 아울러 선생의 파란만장했던 일생을 통해 독립운동사를 새롭게 마주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부산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