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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우장춘로에서 부산을 묻다 /신연성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04-15 19:17:25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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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부산에서 근무한 미국인 원로 교육자의 추억여행에 동행하여 부산과 그 주변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오늘날 부산의 모습에서 반세기 전의 기억을 끄집어내려 애쓰는 그의 표정에서 벅찬 감회가 읽혀졌다. 이 노신사는 자신의 추억이 남아 있을 법한 학교와 보육시설 그리고 그 기억을 이어줄 ‘길’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마음을 달래줄 만한 답을 찾지 못했다. 우장춘로에 이르러 길의 이름이 갖는 의미를 설명하면서 사회가 역사를 기억하는 태도에 대한 담론이 이어졌다.

길은 소통이다. 주민의 일상이 이뤄지는 공간이며 외부와 교류하는 통로이다. 길은 전시장이며 박물관이다. 주민의 일상에 더해 지나간 세월의 흔적이 배어 있는 생명체다. 공동체로서의 도시는 예외 없이 나름의 이미지를 갖는다. 긴 시간을 통해 켜켜이 쌓인 삶의 자취가 주민의 호흡과 생활 속에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시의 이미지는 상징을 통해 구체화하고 형상화한다.

전대미문의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배경으로 인적, 물적 교류가 무한으로 확대되는 세계화의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국가에 우선해 도시 주체성이 강조되면서 세계의 여러 도시는 각자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노력에 열을 올린다. 여기에 더해 우리 사회에서는 지방자치의 진전이 또 하나의 동력으로 작동한다. 자동차 여행을 하다 보면 행정구역이 바뀔 때마다 내비게이션이 진입하는 도시를 흥미로운 슬로건과 함께 소개한다. 부산의 대표적 슬로건은 ‘다이내믹 부산’이다. 산업화의 절정기에 대한민국에게 붙여졌던 수사가 부산으로 옮겨온 데에는 나름대로의 연유가 있겠지만 조금은 막연하고 허전하다.

도시 이미지를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람과 그들의 삶이 어우러지는 공간, 즉 길이다. 세계의 각 도시가 길을 기억하고 교감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길의 명칭을 정할 때 자부심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아내거나 주변의 지역적 특성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데 익숙하다. 반면 서구에서는 사람의 이름으로 길을 명명하는 전통이 두드러진다. 이는 도시 사회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공동체에 바탕을 둔 의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현상이겠지만 도시의 이미지라는 관점에서 가볍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파리 런던 로마 워싱턴 뉴욕 등 글로벌 도시를 여행하면 공항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도시가 드러내고 싶어 하는 인물의 이름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크고 작은 길의 명칭은 예술가, 철학자, 정치인, 사회사업가 등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명사의 이름을 따른다. 하여 길의 명칭이 도시 전체를 박물관으로 만들고 주민과 도시공간의 정체성을 대변해준다.

서구의 이런 모습을 근대사를 통해 선구적인 발전을 이룩한 자만심에서 비롯됐다거나 우발적인 지난날의 관행일 뿐이라고 치부해선 곤란하다. 필자가 LA주재 총영사로 근무한 3년간 LA시내에 한인 동포 이름을 딴 길이 세 곳이나 생겨났다. 시민의 의미 있는 희생과 업적을 길의 명칭으로 기념하는 노력이 신선하고 부러웠다. 길을 주민의 역사공간으로 인식하는 그들의 사회적 합의는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우리의 경우 이러한 사회적 풍토가 만들어지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환경을 살아왔다. 먼저 우리는 오랜 역사를 통해 중앙집권적 왕조체제를 이어왔다. 수도가 아닌 지방이 그리고 왕실이 아닌 신민이 주인이 될 여지가 크지 않은 사회였다. 도시국가, 지방분권, 시민사회의 우위와 같은 사회구조와는 거리가 있었다. 또한 왕조의 분열과 변화, 이어지는 외세의 침입 그리고 이념의 차이로 인한 갈등 등 많은 굴곡을 경험했다. 지방이 사회체제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개인의 업적과 성과는 시류에 따라 매도되기까지 하는 풍토에서 사람이 도시의 상징으로 기억되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우장춘로가 무던히 부산을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대견한 일로 여겨야 할는지 모를 일이다. 도시 정체성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으며 슬로건이나 이벤트를 통해 조작된 이미지는 생명력이 부족하다. 사람과 길이 중심에 서는 부산의 정체성과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작업은 소중한 과제며 시민 모두가 세대를 이어 꾸준히 다듬어나가야 할 소명이다.

전 부산시 국제관계대사·전 주요르단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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