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 앞바다에서 잡히는 멸치는 부산이 가진, 가장 원형에 가까운 식재료다. 몸길이 10~15㎝로 이미 성어가 되었지만 봄에 잡히는 멸치는 여리고 부드러웠다. 소금과 만나면 여린 살점이 녹아나 감칠맛이 풍부한 액젓으로 다시 태어났다. 멸치 한 통 천일염에 절여 놓으면 1년 내내 든든했고 심지어 김장 걱정까지 덜었다. 기장멸치는 그렇게 부산 식문화의 근간이 되었다.
 |
| 부산 기장군 대변항 방파제횟집의 멸치식해. |
하지만 나는 늘 아쉬웠다. 남미 페루 앞바다에서 잡힌 멸치는 깨끗하게 살코기만 발라내 올리브유에 절여 캔에 담으면 ‘엔초비’가 된다. 엔초비는 미국과 유럽에서 샌드위치, 샐러드, 피자 등에 두루 사용되는 요긴한 식재료다. 멸치처럼 작은 생선을 발효시킨 태국의 남프라와 베트남의 느억맘은 ‘피시소스’란 이름으로 세계 각국 요리의 조미료로 활용된다. 엔초비와 피시소스. 이게 뭐 거창한 것처럼 들리지만 영어를 그대로 해석하면 엔초비는 멸치고 피시소스는 액젓이다. 기장 앞바다에서 잡힌 멸치의 품질이나 우리나라의 수산물 가공기술이 페루 태국 베트남보다 오히려 나았으면 나았지 떨어질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럼에도 기장멸치는 왜 엔초비와 피시소스가 되지 못하는지 그게 늘 아쉬웠다.
그런데 지난달 초 엄청난 발견을 했다. 대변항 ‘방파제횟집’의 안주인이 맛이나 보라며 멸치로 만든 식해 한 접시를 건넸다. ‘멸치식해’. 이건 두 가지 점에서 의외다. 일단 식해는 함경도나 강원도의 전통음식으로 부산에서는 생소한 음식이다. 명태나 가자미처럼 살이 희고 담백한 생선을 조, 수수 등의 곡물과 함께 발효시키는 게 상식이다. 멸치처럼 지방이 많고 비린내가 심한 생선으로 식해를 만든다는 건 금시초문이다. 속는 셈 치고 삭힌 멸치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잠시 후 침샘이 폭발하고 정신은 번쩍, 심장은 요동쳤다. 멸치식해는 함경도식 식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맛을 보여줬다. 훨씬 자극적이면서 훨씬 개운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부산의 정서를 닮았다. 밥도둑 랭킹을 정한다면 간장게장, 토하젓, 어리굴젓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음식이다.
어찌나 욕심이 나는지 따로 좀 살 수 있는지 물었다. 아쉽지만 내게 준 것이 지난겨울에 담은 마지막이었다. 늦가을이 되면 그때 다시 오라 했다. 나는 또 한 번 무릎을 쳤다. 봄에 잡히는 기장멸치는 액젓을 담지만 가을에 잡히는 것은 뼈와 살이 단단해 육젓을 담는다. 식해에는 당연히 육젓용 멸치가 어울린다. 가을에 기장에서 잡히는 멸치는 봄에 잡히는 것에 비해 관심도 덜하고 명성도 떨어진다. 그러니까 방파제횟집의 안주인은 멸치식해의 개발로 가을 멸치의 몸값을 올릴 대안을 찾아낸 것이다. 멸치식해만 잘 보급되고 정착된다면 어쩌면 대변항은 봄보다 겨울이 더 맛깔스러운 항구로 변할지도 모른다.
이런 제 말이 의심스럽거나 반드시 확인해보고 싶으시면, 꼭 기억하셨다가 올 11월 이후 기장군 대변항으로 한 번 가보십시오. 일단 저는 반드시 갈 겁니다. 맛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