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평(李羲平)이란 사람이 엮은 ‘계서야담(溪西野談)’이란 책에 실린 옛날이야기 한 토막.
최생(崔生)이란 양반이 있었다. 대대로 벼슬하는 집안 출신이라 그 역시 과거에 응시했지만 낙방의 연속이었다. 점차 가세가 기울었고 부모의 봉양도 쉽지 않았다. 예전에 자기 집안의 은덕을 입은 사람들의 발걸음도 잦아들었다. 최생은 자신을 돌아보았다. “부모 봉양조차 못 하는 내가 무슨 과거란 말인가?” 그동안 지어놓았던 글을 깨끗이 태우고 읽던 책은 모두 친구에게 주었다.
집을 팔아 돈 500냥을 마련해 부모와 처자를 이끌고 청주 고향으로 갔다. 고향에는 논 10결(結)과 노비 10명, 소 3마리가 남아 있었다. 최생은 노비를 불러 모은 뒤 농사에 힘써 10년 뒤에는 큰 부자가 되고 말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면 10년 뒤 각자에게 돈 100냥을 상으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해는 풍년이었다. 최생은 집을 판 돈 500냥으로 곡식을 샀다. 이듬해 최생은 직접 삽을 들고 농사를 지휘하였다. 그해도 풍년이었다. 최생은 자기 소유의 논밭을 모두 팔아 3000냥을 마련해 헐값으로 곡식을 사들였다. 지난해 곡식과 합쳐보니 4000석이나 되었다. 그 이듬해 참혹한 흉년이 들었다. 사람들이 속절없이 죽어 나갔고, 쌀값은 10배로 치솟았다. 노비들은 쌀을 내다 팔자고 졸랐다. 10년이 아니라 불과 2년 만에 거부가 될 수 있는 기회였다.
최생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가서 동네의 부로(父老)들을 불러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찾아오자 사정이 어떤지 물었다. 남녀노소 모두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하소연하자, 최생은 우리 고장 사람들이 굶어 죽는 것을 볼 수 없다면서 곡식을 나눠줄 사람의 명단을 작성해 오라고 했다.
명단에 오른 사람은 500여 농가의 1300명이었다. 최생은 모든 농가에 식량과 종자를 대어주고는 걱정 말고 부지런히 농사를 지으라 하였다. 최생 자신도 남의 땅을 많이 빌려 그해 농사에 특별히 공을 들였다.
다행히 그해는 대풍년이었다. 500농가의 사람들은 빌린 곡식을 갚으려 하였다. 셈을 해 보니 최생이 푼 곡식 4000석은 지난해의 시가로 4만 냥이었다. 하지만 4만 냥은 너무 야박하다는 생각에 모두 의논 끝에 6만 냥을 갚기로 했다. 농민들은 돈을 가지고 최생의 집을 찾아갔다. 최생은 깜짝 놀라며 안 받겠다고 손사래를 치는 것이었다. 자신이 빌려준 곡식의 15배에 해당하는 돈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농민들의 말은 달랐다. 4000석 곡식을 4만 냥에 팔아 다시 온갖 물건을 사들였다가 팔았으면 12만 냥은 충분히 벌었을 것이니, 자신들은 그것의 절반만을 갚는 셈이라는 것이었다. 농민들은 안 받겠다는 최생을 설득했다. 최생의 곡식이 없었으면 100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으리라는 것, 거금을 벌 기회를 버리고 사람을 살린 것이 얼마나 큰 은혜냐는 것이 설득의 논리였다.
최생은 하는 수 없이 그 돈을 받았고 그 돈으로 곡식을 사고팔아 요령 있게 재산을 불렸다. 10년이 되었을 때 그는 노비들에게 100냥씩 상을 줄 수 있었다. 뒤에도 흉년이 들었지만 500여 농가는 늘 최생의 도움으로 어려운 시기를 무난히 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최생의 부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그는 사람의 목숨을 살렸다. 대가를 바란 것이 아니었지만 농민들은 그에게 돈을 다시 벌 기회를 주었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흉년이 들 때마다 동네 사람들은 최생의 곡식에 의지하여 굶주림을 견뎌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부자의 재산은 부자 홀로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적 공유 재산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재산이 부자의 재산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그는 아마도 풍족한 삶을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부에는 지역민을 살리는 공공성이 있었다. 존경받는 부자란 이런 경우다. 대한민국 부자들의 갑질과 도덕적 타락을 목도하는 이즈음 옛이야기의 존경 받는 부자를 새삼 떠올리게 된다. 어디 이런 부자는 없는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