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면서 역사를 돌아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 역사에 대한 성찰을 통해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지금이 더욱 그런 시기다.
주변을 둘러보자. 미·중·일·러가 다시 한반도를 놓고 으르렁거리고 있다. 이런 와중에 정치는 극단적 대립 상태에 있다. 외부 정세가 급격히 변화하는 시기에 이런 일이 겹치면 국가의 미래는 암울해진다. 조선 시대에 유사한 일이 세 번 있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그리고 일제강점기다. 임진왜란은 선조 때 불리한 외세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정치 세력 간 서로 죽이는 정쟁으로 국가가 분열되면서 나타난 사건이다. 병자호란은 광해군 시절 집권세력이 다른 정치세력에 의해 제거당하면서 국가가 불안정해지자 나타난 일이다. 일제강점기는 신구 세력 간 파괴적 정쟁으로 나라가 쪼개져 나타난 결과물이다.
정치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한편으로는 갈등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타협을 통해 국가발전의 새로운 동력을 열어가는 장치다. 그런데 이 갈등은 종종 파괴적으로 치닫기도 한다. 세 단계를 거쳐 이런 일이 일어난다. 첫 번째는 이성적 논쟁 단계다. 서로의 주장을 가지고 상대를 설득하는 건강한 단계다. 두 번째는 감정적 대립 단계다. 서로를 증오하는 단어들이 난무하는 시기다. 세 번째는 파괴적 정쟁 단계다. 서로를 죽이거나 매장하는 단계다.
불행히도 한반도는 파괴적 정쟁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조선의 당파 싸움이 대표적이다. 사실 당파 싸움은 무조건 나쁜 게 아니다. 당파는 서로 다른 신념이 부딪히면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생각을 탄생시키는 건강한 정치적 장치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대 학자들도 끊임없이 논쟁한다. 학파가 생겨나는 이유다. 하지만 여기에는 원칙이 있다. 논쟁이 이성적이어야 한다. 조선의 당파 싸움도 시작은 이성적이었다. 하지만 싸움이 진행되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졌고, 그 결말은 서로에게 치명적 상처를 주는 파괴적 정쟁이었다.
선조 때 이런 좋지 않은 선례가 만들어졌다. 이 시대에 이르자 동인과 서인이라는 당파가 생겨났다. 이들도 처음에는 이성적 논쟁을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감정이 지배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참혹하게 서로 보복하는 싸움이 시작됐다. 대동계 사건이 빌미를 주었다. 그 중심에 정여립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선조 2년 과거에 급제해 홍문관 수찬 벼슬까지 한 사람이다. 오늘날로 치면 교육부 사무관쯤 되는 직이다. 이 사람은 원래 서인이었다. 그러다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동인으로 적을 옮기면서 스승인 이이 등을 비판한 일로 서인으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됐다(서인은 이이를 가장 큰 어른으로 모셨다). 그는 스승과의 논쟁도 서슴지 않았다. 이이도 이것을 잘 받아주었다. 하지만 똑똑한 정여립은 상대의 마음을 긁는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 마음이 맞으면 서인이면서도 동인과 어울리는 배짱을 지녔다. 이런 그의 성향과 스승을 공격했다는 소문은 그렇지 않아도 집권세력인 동인에 대해 불편해하던 서인의 감정을 폭발시켰다. 이이가 사망하자 정여립은 서인이 좀생이라며 아예 동인으로 신분을 바꿨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선조도 못마땅해했다. 그러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전라도로 낙향했다. 이 정도에서 끝날 것 같던 정여립 사건은 후일 엄청난 파괴적 정쟁으로 치달았다.
거칠지만 행동력이 남다르게 뛰어났던 그는 낙향 후 대동계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여기에는 학자나 관료뿐만 아니라 무사 승려 노비 심지어 산적도 가담했다. 대동계에서의 대동이라는 말은 유교적 유토피아와 관련이 있다. 유교는 모든 사람이 신분 차별 없이 평등하게 대동 단결하는 세계를 이상으로 한다. 그러다 보니 당시의 천민 계급이나 산적 무리도 참여할 수 있었다. 그만큼 정여립의 생각은 호탕하였다. 대동계에서는 군사훈련도 했다. 이것을 배경으로 전라도에 침투한 왜구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면서 조직은 전라도를 넘어 황해도에 이르기까지 전국화 되었다.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황해도 관찰사가 대동계가 국가 전복을 꾸미고 있다는 있지도 않은 고변을 했다. 여기서 서인은 이성적으로 판단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들은 이 사건을 정여립과 동인을 잔인하게 공격하는 빌미로 삼았다. 서인의 강경파 정철이 앞장섰다. 역적 정여립을 체포하고 국가 계엄을 선포해서 역모를 막아야 한다는 상소문을 선조에게 올렸다. 선조는 이를 받아들여 정철에게 사건 조사와 국문을 담당하게 했다. 정여립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결하였고 이후 1000명이 넘는 동인 계열 학자와 관료가 고문을 받고 죽어갔다. 당파로 인한 최초의 대규모 파괴적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 일로 인해 서인과 동인은 서로에게 비수를 꼽는 원수로 변했다.
서인과 동인의 파괴적 대립은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시 동인 세상이 되자 서인도 동인에게 똑같이 당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국가는 피폐해졌고 그 끝은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파괴적 정쟁은 그치지 않았다. 북인(동인에서 분파된 당파)과 서인의 피를 보는 투쟁이 있었고 이것의 결과가 인조반정이다. 그 후 국가는 병자호란을 겪었다. 이쯤이면 역사의 교훈을 얻을 만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숙종 때는 파괴적 당파 싸움이 절정에 도달했다.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이 일어났다. 숙종이 당파를 교체하며 정권을 맡기자 밀려났던 정치세력이 돌아와 다른 당파를 제거한 사건들이다. 이런 전통이 한국 정치사에 대물림되면서 파괴적 데자뷔가 반복해서 일어났다. 조선 말에도 신구 정치세력 간 파괴적 정쟁이 있었다. 이것의 결과가 일제강점기다.
지금 한반도는 매우 위험하다. 미·중·일·러의 힘 겨루기가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가가 똘똘 뭉쳐도 헤쳐 나가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정치권은 감정적 언쟁을 넘어 파괴적 정쟁으로 치닫고 있다. 이로 인해 국가와 국민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역사를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광운대 경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