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해외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은 가는 곳마다 책을 사는 일이다. 나는 일단 전공 영역인 교육학 관련 책을 우선해서 구매한다. 이것이 나의 여행 취미이며 습관이 되었다. 책을 사지 않으면 여행하는 재미가 없다. 낮에 산 책을 읽으며 여행하는 것이 나의 최대 즐거움이다. 낮에 책을 구매하지 않으면 밤이 외롭다. 그래서 나의 세계여행은 ‘책 구매’에서 시작되며, 늦은 밤 숙소에서의 ‘책 읽기’로 이어진다.
가는 곳마다 대학을 방문하는 일은 여행 코스의 중심이 된다. 몇 해 전 미국의 하버드대학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런데 구내서점에는 인문학 관련 책은 거의 보이지 않고, 온통 기술과 컴퓨터 관련 책뿐이었다. 이를 보고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기술주의에 빠진 학문 경향에서 미국 사회의 미래가 그렇게 밝지 않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기술로 세계를 지배한 나라는 그 기술 때문에 폐망할 것을 예고한다. 스페인 포르투갈이 그랬다.
그런데 영국 런던대학의 교육전문대학원을 방문했을 때는 미국 상황과는 너무나 달랐다. 구내서점에는 인문학 책과 교육학 서적이 엄청나게 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려 90여 권이나 되는 책을 구매했다는 것은 이 대학의 연구 수준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책을 가방에 다 넣을 수 없어 일부는 소포로 부쳐야 했다.
출판 규모는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말해준다. 기술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모두 번영해야 선진국이 될 수 있다. 인문학자 한스 요나스는 기술적 진보에는 반드시 도덕적 진보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시카고 대학의 너스바움 교수는 인문정신이 부재하면 민주주의가 위태롭다고 하였다. 그러기에 책 읽기를 통한 인문정신의 배양이 중요하다.
여행지에서 책을 사 읽으면서 보내는 나의 색다른 여정은 부산교대에 책을 많이 읽도록 인도하는 ‘인문교육학과’ 대학원을 설립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강좌는 철학 미학 사회학 상담학 치유학 시민교육 등 다양하다. 강사는 내부 교수를 가능한 한 배제하고 주로 우수한 외부 강사 중심으로 짜고 학습자가 원하는 성인교육과정을 운영한다. 고전 읽기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유적지 답사도 하고 인문학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카데미도 탐방한다. 그래서인지 설립한 지 6년째인데 입학생이 항상 20여 명이나 된다. 신부, 목사, 형사, 교도소 교정직, 물리치료사, 독서지도자, 상담자 등 직업군이 다양하다. 40, 50대 주부가 많지만 70대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있다. 성인학습자들은 졸업할 때쯤 되면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 술회한다. 물리치료사는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고객의 허리 치료기술이 좋아졌다고 하고 손님도 더 늘었단다. 경쟁 만능주의 시대에 인문학의 효력이 매우 강력하다는 방증이다. 이런 시민이 자꾸 많아져야 한국사회의 교양과 문화 수준은 높아질 것이다.
모 지방 신문사에는 매주 50여 권의 책이 도착하는데 이 책을 읽는 기자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많은 책이 기자의 책상 위를 늘 굴러다닌다고 한다. 기자가 책을 보지 않으니 사건을 이해하는 안목이 좁을 수밖에 없고, 이러면 여론은 오도되기 쉽다. 그래서 어느 기자는 자기의 정신적 고갈을 느껴 ‘책 읽는 기자모임’을 결성했다고 한다. 더는 망가지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다행히 이런 기자가 있기에 우리나라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있다.
나의 해외여행은 자연과, 사람과, 역사와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여행지에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서로 다른 민족과 종족의 이색적 취향 속에서 색다른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들을 더욱더 깊게 이해하려면 그 나라의 정신에 영향을 준 과거의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그리하려면 역사를 알아야 한다.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의 기록을 정리한 책을 읽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방문하는 나라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나의 해외여행은 방문한 나라의 책을 사고 읽는 것이다. 그리고 콜콜 주무시는 수호신의 보호를 받으며 늦은 밤 스탠드를 켜놓고 고요히 책 읽기의 삼매경에 빠져든다.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는가?
부산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