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이야기다. 제나라의 환공이 관(冠)을 잃어버렸다. 제왕의 상징을 잃어버린 환공은 수치심에 사흘 동안 정사를 폐했다. 재상인 관중이 진언한다. 차라리 선정을 베풀어 부끄러움을 만회하시라고. 환공은 대사령을 내리고 곡식을 푼다. 그러자 백성들이 노래를 부른다. ‘왕이시여, 관을 한 번 더 잃어버리시라’고. 결국 환공은 춘추오패의 첫 번째 패자(覇者)가 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화(火)가 났다. 최근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언론에 흘린 이야기다. 그 고위 관계자의, 아마도 비서실장이나 정무수석, 말이 아니라도 문 대통령이 화가 잔뜩 나 있다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첫 단초는 올해 3·1절 행사 때다. 이른바 ‘빨갱이-친일파’ 프레임을 들고나왔다. 그 전날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문 대통령은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던 ‘중재자’의 노고가 허사가 될 위기였으니 말이다.
두 번째는 5·18 행사 때다. 이때는 ‘독재자의 후예’라는 신종 프레임을 내밀었다. 집권 2년을 지나면서 국정운영 곳곳에 펑크가 나고 있다. 소득주도 성장의 부작용이 역대 최악의 경제성적표로 되돌아온다. 김정은은 문 대통령에게 ‘오지랖’ 운운하면서 압박에 압박을 가한다. 게다가 기세가 오른 자유한국당은 ‘패스트트랙 철회’를 요구하면서 계속 장외에서 농성 중이다. 짜증이 날 만도 하다. 그런 흐름에서 통렬하게 한다고 한 말이 바로 ‘독재자의 후예’다.
지난달 29일 을지태극 국무회의가 열렸다. 올해 처음 시행되는 을지태극훈련은 대규모 복합재난에 대비한 위기 대응 연습이다. 문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또 한 번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뜬금없이 한국당 강효상 의원의 이른바 ‘굴욕외교-한미 정상회담 기밀 유출’과 관련하여 한국당에 직격탄을 퍼부었다. 당리당략이 아니라 상식에 기초하는 정치를 하라고 훈계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새벽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유람선 사고가 터졌다.
문 대통령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지난 2년 동안 적폐를 발본색원한다고 했지만 헛발질의 연속이다. 국민의 뇌리에 남는 것은 ‘내로남불 정권’밖에 없다. 경제는 IMF 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 다닌다. 북핵 문제는 이야기할 것도 없다. 문 대통령으로서는 한다고 하는데 도무지 밑도 끝도 없는 수렁에 빠져드는 느낌일 것이다. 아마 예전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직 못 해 먹겠다”고 했던 심정을 이해할 만도 할 것이다.
사실 세간에 문재인이란 이름이 각인된 것은 바로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 때이다. 침착함을 잃지 않고 상주 역할을 하던 문 변호사에게 많은 사람이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후 대선 과정에서 유권자가 ‘문재인’에게 갖게 된 인상은 ‘선해 보인다. 부드러워 보인다. 과묵하다’는 긍정적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어찌 되었든 2012년 대선 패배 이후 절치부심하는 그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문재인의 모습은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특히 민주당 대표로 선출되었던 2015년 초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승만-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했을 때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문 대통령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을 보면 표변(豹變)이란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단어를 찾기가 쉽지 않다. 원래 표변은 군자표변(君子豹變)에서 쓰이듯이 좋은 뜻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표변은 무엇을 또 어떤 경우를 말하는 것일까.
문 대통령은 초심을 되찾아야 한다. 그 당시 속마음이 ‘일단 정권을 잡고 보자’는 식이었다고 해도 그때 상황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억력은 별것이 아니지만, 국민의 집단 기억력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국가 지도자가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잃게 되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국민은 점잖고 참을성 많은 문재인을 기억하는데, 대통령이 자꾸 화(火)를 내어서야 되겠는가. 2017년 5월 10일 취임사에서 했던 “오늘부터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분도 진심으로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습니다”라고 했던 초심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이다.
정치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