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태산같이 무겁게 행동하라’. 전쟁 준비를 다 끝내고,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20여 일 만에 거제도 옥포에서 치른 일본과의 첫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한 말씀이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자신감이 배 있다. 할 수 있는 준비를 다 해두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승리다. 여기서 임진왜란의 대전환이 시작되어 조선에 희망의 불씨를 지필 수 있었다.
임진왜란 1년 전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전투력의 근본인 병사에 대한 훈련, 병기의 제작과 정비, 특히 군선 건조와 해상전투 훈련, 포 사격과 활쏘기 훈련 등을 통해 전쟁에 대비하였고 주기적으로 전투태세와 병기 상태를 점검하였다. 거북선의 포 사격 훈련은 왜란 발발 이틀 전 완료하였다.
한국이 주도하는 조선업이 바닥을 쳤다고 한다. 그렇다면 잘될 일만 남은 것일까? 시장 회복의 모습과 양상, 경쟁 구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수주산업의 큰 틀을 바꾸긴 어렵겠지만 향후 조선 시장을 주도할 핵심 경쟁력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는지는 곱씹어 보아야 한다.
선박과 해양설비 설계는 제대로 하고 있는가? 경쟁력의 근원은 설계 인력의 질과 수준이다. 선박의 성능을 결정하는 기본설계 능력, 장비를 배치하고 연결하며 구조를 전개하는 상세설계 능력, 제작과 설치공법의 결정, 안전과 효율성을 고려하는 생산설계 능력은 어느 하나 포기할 수 없는 조선소의 근간이다. 특히 조선소의 특성과 설비, 제조 문화에 맞추어야만 하는 생산설계를 간과해서는 생존하기 어렵다.
선박, 해양기자재 조달의 전문성은 답보 상태이거나 많이 낙후되었다. 기술과 가격 둘 다 정상적인 경쟁의 양태를 벗어나 있고 조선소별로 비효율적인 이해관계의 성곽을 쌓고 있다. 협업을 통한 기술의 주도, 조달 체계의 전문성 증진, 기자재 제조 표준화, 열린 경쟁 체제 실현, 조선해양기자재 연구개발(R&D) 투자 확대 등 변화와 혁신을 해야 할 분야는 널려 있다.
조선소의 직급과 임금 체계, 외주관리 체계에 대해서도 새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양분된 직급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여야 한다. 일의 분류에 따라 공평한 단일 직급체계가 가능하다면 임금 체계에 대한 접근도 쉬워질 것이다. 외주관리는 철저한 상호이익 원칙에 따라 한국 조선소 특유의 성과운영 체계를 만들어 내야 한다. 조선소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설비와 인력 등의 고정자산이다. 획기적인 유동화 방안에 대해서도 조선소의 여건에 따라 적극적으로 검토하여야 한다.
최고의 난제는 시장의 변동성에 대한 대책이다. 이제는 조심스럽게 시장 동향에 따른 선제대응 시스템을 고민해야 한다. 다른 나라에 배를 팔아 평생 ‘을’로 살 것인지, 우리의 기술과 기자재로 배를 지을 수 있도록 해주어 ‘갑’의 입장을 취할 것인지는 적극적으로 시도해 볼 만한 우리의 선택과 결단이다. 여기에 기성복 개념의 비즈니스 모델을 자산운용사와 더불어 시장 특성에 맞춰 고안해 낸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조선산업의 기술 발전은 용접 기법과 블록 공법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지난 30년은 좀 더 효율적이며 경제적이고 안전한 공법으로 응용 발전시킨 단계였으며 이제는 성숙기에 달했다. 조선 전 분야에 걸쳐 4차 산업 기술과의 접목을 시도하여 새로운 단계의 기술혁명을 주도하여야 한다. 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우리나라에서 기선을 잡고 실행해야 가능한 일이며 시장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다. 먼저 해야 신기술혁명 시대의 국제표준을 장악하게 된다.
조선산업은 조선소의 연구개발 역량이 가장 앞선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산·학·연 협력 과제나 대학 주도의 과제는 시장경제의 힘이 받쳐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조선소와 선주들의 문전에서 거절당하기에 십상이다. 실용화도 어렵고 시장성이 없다. 조선 기술혁명의 시동은 조선소들이 걸어야 하고 국가와 학계에서 백업해야 한다. 조선소가 주도하는 국가적 연구개발력의 집중과 총화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해운과 조선의 동반 발전을 위해 한국해양진흥공사를 출범시켰지만 산업생태계의 규모와 역동성을 고려할 때 해운과 조선을 함께 견인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해양강국의 국가적 열망이 지속적이며 일관되게 국가의 전략과 장기계획에 녹아 있어야 한다. 대형 조선소를 필두로 대규모 구조조정의 막이 올랐으니, 중소형 조선소를 포함한 생태계 전체에 강한 생명력을 불어넣으려면 우리의 특성과 강·약점을 따져 통합의 규모와 역할에 대해 세심한 준비를 해야 한다. 옥포해전처럼 준비된 자의 묵직하고 단호한 감행이 승리를 보장한다.
전 대우조선해양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