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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끼니] 영혼 적셔주는 시락국 한 그릇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06-19 19:38:59
  •  |  본지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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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래기는 무청을 말린 것이고 우거지는 배춧잎을 말린 것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시골집 처마에는 어디 할 것 없이 푸른 무청이 주렁주렁 널렸다. 시래기가 잘 마르기 위해서는 일교차가 커야 한다.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수분이 빠져야 부드러워진다. 햇볕이 잘 들어야 하지만 직사광선을 맞으면 색이 바랜다. 이런저런 사정을 고려하면 처마 밑만큼 좋은 건조장도 없는 셈이다. 그렇게 사그락사그락 마른 시래기는 연중 요긴한 식재료로 쓰인다. 된장을 풀어 국을 끓이면 시래깃국이 되고, 밥을 지으면 시래기 밥이 되고, 죽을 끓이면 갱죽이 되고, 멸치와 갖은 양념을 넣고 푹 조린 지짐이는 밥도둑이 따로 없다.

술에 지친 심신을 위로해주던 시락국.
하지만 요즘은 처마 밑에 시래기 꾸러미가 널린 모습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된장 담그는 집도 찾아보기 힘든 형편에 시래기 같은 하찮은 재료야 오죽할까. 더군다나 무를 재배하고 우수리로 얻던 무청이었건만 이제는 형편이 바뀌었다. 요즘은 무청을 얻기 위한 무를 따로 재배한다. 이를 시래기무라 한다. 일반 무를 상품화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키우면 무청이 억세다. 이에 반해 시래기무는 뿌리인 무가 작은 대신 무청의 갈기가 크고 풍성하다. 시래기무는 무청만 취하고 무는 버린다. 이렇게 개량된 시래기무의 품종만 20여 종에 이른다고 한다.

강원도 양구군 펀치볼과 전라남도 해남군 땅끝마을에서 생산된 시래기에는 ‘명품’이라는 거창한 수식어까지 붙는다. 하찮은 식재료의 대명사였던 시래기의 반전치고는 사뭇 드라마틱하다. 이게 다 웰빙 열풍 덕분이다. 최근 들어 시래기는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한 건강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경험에 지혜가 더한 조상님들의 혜안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억양이 강해 된소리가 많은 경상도에서는 시래기를 ‘씨래기’로 발음한다. 한술 더 떠 시래깃국은 시락국 혹은 씨락국(이하 시락국)이라고 한다. 바다장어로 육수를 낸 통영 서호시장의 시락국은 이제 전국적으로도 명성이 자자한 향토음식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경상도식 시락국은 대부분 멸치육수에 된장을 풀고 시래기를 넣고 약한 불에 뭉근하게 오래 끓인다.

단골 시락국집이 있었다. 전라남도 해남 땅끝마을에서 키우고 말린 시래기와 순천에서 담은 재래식 된장을 사용해 제법 깊고 구수한 맛을 냈다. 술을 마신 후 속이 허해도 찾고, 술 마신 다음 날 속이 쓰려도 찾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에 하얀 쌀밥을 말고 깍두기를 곁들이면 저절로 뚝배기에 코를 박는다. 그럼 신기하게도 뚝배기가 말을 걸어온다. “괜찮아, 괜찮아. 마시고 싶으면 얼마든지 마셔. 마시다 지치면 언제든 찾아와”.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웅숭깊은 맛을 기대하기 어렵다.
시락국은 너무 평범한 음식이라 오히려 제대로 된 걸 만나기 쉽지 않다. 비싼 시래기 대신 배춧잎만 잔뜩 든 허여멀건 한 시락국은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영혼을 적셔주는 시락국 한 그릇 만나기 힘든 세상을 어찌 풍요롭다고 할 것인가. 오호 통재라!

맛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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