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올해 칸영화제의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한국 영화 100주년의 쾌거이자 경사다. ‘기생충’은 개봉 17일 만인 지난 15일 누적 관객 800만 명을 넘어섰다.
기자는 11년 전 칸영화제 때 봉준호 감독을 인터뷰했다. 봉 감독은 2006년 ‘괴물’로 감독 주간에 초청된 데 이어 2년 만에 옴니버스 영화인 ‘도쿄!’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대받았다. 당시 영화제 측은 도쿄 출연 배우와 감독의 입장로를 상영관의 블루 카펫 대신 레드 카펫으로 격상시켰다. 레드 카펫은 공식 부문 경쟁작 관계자만 밟을 수 있는 상징적인 장소였기에, 꽤 파격적인 대우였다.
그의 인기는 칸영화제에 앞서 찾았던 미국에서도 뜨거웠다. 2007년 9월 국제신문은 세계 영화의 심장부인 미국 LA에서 활동하는 1.5세대, 2세대 ‘코리안-어메리칸’ 감독들의 디아스포라(이방인)의 삶을 취재했다. 그때 가장 좋아하는 한국 감독이 누구냐고 묻는 말에 하나같이 “박찬욱, 봉준호”를 외쳤고, “두 감독의 작품을 보면서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꼈다”고 으쓱해 했다.
영화 담당 기자로 일했던 기간은 ‘영화도시 부산’의 저력을 체감하던 시기였다. 미국 감독들은 기자가 부산에서 왔다고 하니 “부산국제영화제(BIFF) 최고”라며, 한달음에 달려와 취재에 응했고, 칸에서의 봉 감독은 차기작인 ‘마더’를 언급하며 “부산에서 꼭 촬영하고 싶다”고 했다. 실제 ‘마더’는 부산 남구와 동구에서 주요 장면을 찍었다.
칸영화제는 한국 영화계와 인연이 깊다. 2002년 임권택 감독 ‘취화선’(감독상)을 시작으로 2004년 박찬욱 감독 ‘올드보이’(심사위원대상), 2007년 이창동 감독 ‘밀양’(여우주연상), 2009년 박찬욱 감독 ‘박쥐’(심사위원상), 2010년 이창동 감독 ‘시’(각본상) 등 여러 수상작을 냈고, 마침내 올해 봉 감독이 마지막 퍼즐을 화려하게 채웠다.
같은 기간 칸과 부산의 거리도 한껏 가까워졌다. 티에리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은 2001년 부임과 함께 거의 매년 BIFF를 찾아 김동호 전 BIFF 집행위원장과 막역한 우정을 쌓았다. 김 전 위원장은 특유의 친화력과 겸손함, 성실함으로 세계 영화인들을 부산으로 모았고, BIFF를 통해 끊임없이 한국 영화를 해외에 소개했다. 부산시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국내 최초로 영화 촬영 전반을 지원하는 기관인 부산영상위원회를 설립(1999년)해 원스톱으로 촬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영화인들은 부산에서 원 없이 작품을 찍고, BIFF가 펼쳐놓은 판에서 세계 유수 영화인들과 소통하며 한국 영화의 저력을 보여줬다. 2000년대 들어 칸에서 잇따라 들려온 낭보에는 부산이, BIFF가 깔아놓은 이 같은 토대가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금, ‘영화도시 부산’은 공허하게 다가온다. 2014년 불거진 영화 ‘다이빙벨’을 둘러싼 갈등이 수년간 이어지면서 세계 영화인들이 부산을 바라보는 시선에 불신이 생겼고, 칸·베니스·베를린영화제 관계자들은 최근 몇 년간 부산을 찾지 않고 있다. BIFF에 오는 국내 영화인도 줄어들어 분위기는 예전만 못하다. ‘문화시장’으로 기대됐던 오거돈 부산시장은 취임 1년이 되도록 뚜렷한 문화정책을 내놓지 않고, 수년 전 본사를 부산으로 옮긴 영화진흥위원회는 지역 인재를 키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부산은 한국 영화의 태동지다. 국내 최초의 극장으로 알려진 행좌(1903), 최초의 영화제작사인 조선키네마(1924)가 모두 부산에 있었다. BIFF가 부산에서 싹을 틔워 이른 시간 내 세계로 뻗어 나간 데는 깊게 뿌리 내린 ‘영화 DNA’도 작용했을 터. 이렇게 엉거주춤 제자리만 맴돌 수 없는 이유다.
때마침 BIFF가 제24회 영화제 100여 일을 앞두고 새 인물들을 영입하며 조직을 정비한다고 한다. 한국 영화 100주년인 만큼 그간의 부진을 씻고 재도약하기 좋은 때다. BIFF가 다시 본궤도에 올라 세계 영화인들이 앞다퉈 찾고, 한국 영화도 BIFF의 레드 카펫을 밟고 세계 무대에서 빛나길 바란다.
독자여론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