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 무렵 ‘갤러그’라는 전자오락 게임에 푹 빠진 적이 있었다. 친구와 했던 약속 시간이 아직 남았거나 공부를 한답시고 도서관에 앉아 있다 머리가 지끈거릴 땐 이만한 소일거리가 없었다. 빗발처럼 쏟아지는 외계인 비행물체의 폭탄 세례를 이리저리 피하면서 상대를 역공하느라 안간힘을 쏟다 보면 준비했던 100원짜리 동전이 다 떨어져 아쉽게 자리에서 일어서곤 했다.
당시 갤러그는 10, 20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과 달리 1980년대에는 이처럼 중독성 있는 오락물이 그다지 존재하지 않았던 까닭일 것이다. 그런 만큼 당연히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도처에서 터져 나왔다. 여론에 못 이긴 정부가 한때 대대적인 단속까지 벌였으나 갤러그 열풍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잊고 지냈던 예전의 전자오락 게임이 새삼스럽게 떠오른 건 최근 온라인·스마트폰 게임을 둘러싸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해성 논란을 접하면서다. 이전에도 이와 관련한 갑론을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갑작스럽게 첨예한 사안으로 부각된 데는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질병표준분류기준(ICD) 개정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WHO는 지난달 말 열린 총회에서 ‘게임 이용 장애(Gaming disorder)’를 질병 목록에 포함시켰다. 게임 이용 장애란 쉽게 말하면 ‘게임 중독’이다. 다른 일상 생활보다 게임을 중요하게 여기고 각종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남에도 이런 행위를 12개월 이상 지속한다면 질병이라 판단해 적극적인 조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WHO가 결정을 한 이상 회원국들은 2022년 1월부터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해 관리해야 한다.
WHO 조치는 권고사항인데다 2022년에 즉각 효력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회원국들은 내부 여론 수렴을 거쳐 도입 여부를 결정하면 되기 때문에 실제 시행은 2026년이나 돼야 가능할 전망이다. 그렇지만 이 사안은 각계의 의견이 엇갈리면서 벌써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가 됐다. 게임에 열광하는 행위를 병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어서다. 게임 산업 주무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민 건강을 책임지는 보건복지부마저도 상반된 주장을 내놓을 정도다.
WHO 방침의 파장이 미치는 곳은 또 있다. 그동안 게임산업을 지역경제 성장 축으로 삼으려던 각 지자체다. 게임에 대한 여론이 좋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다양한 규제가 나올 수밖에 없다. 게임 중독이 질병군에 들어갈 경우 자타공인 ‘e-스포츠 도시’라는 부산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부산 게임산업은 2009년 지스타 개최 이후 폭발적인 성장세다. 2017년 기준으로 지역 게임 업체는 110개사로 2009년 24개보다 4.6배가 늘었다. 관련업 종사자는 같은 기간 4.3배, 연 매출액은 9배 가까이 증가했다.
부산시는 WHO 방침이 나온 이후 줄곧 반대 입장을 천명했다. 지난 13일에는 보도자료를 통해 게임은 4차 산업혁명시대의 필수 성장동력이라고 강조한 뒤 부작용에 대한 대책 마련에 주력하되 관련 산업을 지속적으로 육성하겠다는 의지는 확고하다고 밝혔다.
이런 와중에 부산과 게임업계에 고무적인 일도 생겼다. e-스포츠의 주된 활동층인 20, 30 대의 반발을 의식한 여당은 최근 ‘게임 질병코드 도입’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북유럽 3국 순방 중 스웨덴에서 열린 한국-스웨덴 e-스포츠 국가 대항 교류전을 관람한 뒤 “e-스포츠가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는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소감을 말했다. 업계에서는 문 대통령의 이런 발언을 2017년 대선 당시 내걸었던 ‘게임 규제 철폐’ 공약과 연계해 긍정적인 쪽으로 해석하고 있다.
희소식은 더 있다. 지난 18일 오거돈 시장은 국제e-스포츠연맹 회장을 만나 ‘2019 세계 e-스포츠 정상회의’ 부산 개최를 확정했다. 올해 4회째인 이 행사는 2017년부터 내리 3년간 부산에서 열리게 됐다. 이는 부산이 e-스포츠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려주는 지표다.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워서는 안 된다. 게임 중독이 질병 수준이라는 WHO의 경고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더라도 부작용을 이유로 전체 산업을 팽개칠 수는 없는 일이다. 게임 산업의 긍정적 부분과 과다한 게임 몰입을 구분한다면 얼마든지 효과적인 관리가 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정부도 신산업 성장 동력을 억제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e-스포츠 활성화에 주력하는 부산의 움직임은 여전히 유효할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아주 혁신적이며 진취적인 e-스포츠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긴 하지만.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