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쪽으로 패스! 좋았어.” “야, 저기, 막아 막아!”
근래 이른 아침부터 동네가 부쩍 시끌벅적하다. 초등학생들이 등교도 하기 전에 ‘미니 축구’를 한다. TV에서도 축구 관련 프로그램이 봇물이다. 이런 축구 열기. 2002년 6월 한일월드컵 이후 처음이다. 손흥민의 선전과 U-20 청소년대표팀의 대약진이 기폭제가 됐음은 불문가지다. 2002 한일월드컵을 직접 취재하는 행운을 누렸던 필자로서는 이런 축구 붐이 반갑지 않을 수 없다.
말 나온 김에 U-20 월드컵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보자. 한국-우크라이나의 결승전을 보면서 필자는 사실 또 다른 의미의 감동을 느꼈다. 첫 골과 결승골의 주인공인 우크라이나아의 수프리아하와 세 번째 골을 넣은 치타이슈빌리의 소속팀이 ‘디나모 키예프’이기 때문이다. 이 팀은 세계축구사에서 전쟁과 연결된 가장 비극적인 경기의 직접 피해자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여름 우크라이나 키예프를 점령한 독일군은 최강팀을 내세워 지역팀과 경기를 한다. ‘디나모 키예프’ 소속이었으나 빵공장에서 일하던 선수들이 다시 축구화를 신고 독일팀을 눌러버렸다. 청년들은 ‘반드시 패하라’는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협박에 굴하지 않았다. 대가는 가혹했다. 체포, 고문, 강제수용소 수용 등 고난 끝에 4명이 총살당하거나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세월이 흘러 우크라이나가 독립하고 팀은 부활했다. 불세출의 스트라이커 안드레이 셰브첸코, 한국축구대표팀 최초의 외국인 감독 아나톨리 비쇼베츠 등을 배출했다. 그 후배들이 이번에 U-20 월드컵 우승을 일궜다. 진심 어린 찬사를 보내야 할 이유로 모자람이 없다.
축구는 이제 ‘지구촌 유일종교’로 불릴 정도로 세계적 보편성을 장착했다. 피파(FIFA)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2000년대 이후 월드컵 기간에 전 세계 300억 명이 경기를 시청하며, 특정 경기는 지구 인구의 4분의 1인 16억 명이 동시에 지켜본다. 문제는 이런 보편적 파급력에다 민족주의 및 국가주의 같은 집단 최면의식까지 결부되면서 축구는 전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기도 했다는 점이다. 굳이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의 ‘축구는 총성 없는 전쟁’이라는 정의를 상기하지 않더라도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같은 독재자가 축구를 체제 선전 도구로 악용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는 평화와 화합, 독립과 통일의 매개체 역할을 충실히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초기인 1914년 12월 25일 벨기에 전선에서 싸우던 독일군과 영국군이 “이날만은 싸우지 말자”며 친선 축구경기를 펼친 사건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분쟁으로 핏물이 쉴 새 없이 흐르던 아프리카에서 축구는 재통일과 평화를 위한 마중물이 됐다. 후투족과 투치족의 인종 청소 분쟁이 극심했던 르완다에서는 독일 출신 루디 구텐도르프 감독이 두 부족 출신 선수를 정확히 절반씩 선발한 대표팀을 꾸렸다. 후투족 선수의 크로스를 투치족 선수가 헤딩골로 연결시키며 케냐를 누르자 5만 관중은 종족 구분없이 얼싸안고 울었다. 또 종교적 정치적 분열이 극심했던 코트디부아르의 경우는 또 어떤가. 이 나라 출신의 디디에 드록바는 2006년 TV광고에 출연해 조국의 위정자들과 국민을 향해 재통일, 비무장, 용서를 촉구했다. 그와 대표팀이 아프리카네이션스컵 결승에 진출하자 남부 기독교 세력과 북부 이슬람 반군들이 함께 열광했다.
이렇듯 축구는 전쟁과 평화, 모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럼에도 굳이 한쪽을 택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평화다. 문호 올더스 헉슬리는 “축구는 진정 전쟁과 살인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축구는 전쟁과 폭력보다 평화와 통일의 편임을 확신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최근의 호국보훈의 달이자 축구의 계절인 6월, 그것도 6·25 한국전쟁 발발 69주년인 오늘 아침, 이런 상상을 해본다.
“지구촌, 그리고 전 우주 공간의 축구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국전 발발 70주년인 2020년 6월 25일 오늘 한반도의 허리인 비무장지대(DMZ) 특설 경기장에서 열리는 세계평화 기원 축구경기 중계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경기는 최근 급속히 진행된 한반도 화해 협력 노력의 성과로 완전한 비핵화 합의가 성사되고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이 체결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국제연합(UN) 주최로 마련됐습니다. 남북한 최고 지도자와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대통령 및 수상, 연합군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21개국 정부 수반이 모두 자리했습니다. 아울러 오늘 경기는 유튜브와 공중파를 통해 전 세계와 우주공간으로 생중계 됩니다. 부디 축구와 함께 전쟁은 가고, 평화여 오라!”
누가 알겠는가? 내년 6월 25일엔 온 지구촌에 이런 방송 멘트가 울려 퍼질지 말이다. 북미 간 친서와 대화 재개 가능성 소식이 들리는 이런 날 아침, 유쾌한 상상 아닌가.
편집부국장 bungs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