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세의 어린이가 담배를 배워 즐겨 피우며, 남녀노소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배를 타고 가다 태풍을 만나 우리나라에 표착한 뒤 13년간 억류생활을 했던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이 쓴 ‘하멜표류기’의 한 구절이다. 하멜에겐 당시 조선은 백성 대다수가 담배를 피우는 ‘애연국’으로 각인됐지만 실상은 다르다. 담배가 좋아서 피운 게 아니라 횟배 치료를 위한 흡연이 대부분이었으며, 어린이는 특히 그러했다. 시골에선 1970년대까지 이런 의학적 근거 없는 민간요법이 이어졌다. 국민의 기생충 감염률이 80%를 웃돌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기생충 감염률이 2%대로 낮아졌지만, 한반도가 숙주 신세에서 벗어나려면 아직 멀었다. 40여 년 전 남한의 후진적 보건 현상이 현재 북한에서 목격되고 있기 때문이다. 질병관리본부의 탈북주민 건강조사(2005~2008년) 결과에 따르면 청소년의 35.5%, 성인의 24.6%가 기생충에 감염된 것으로 추산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 보듯, 남한은 빈부격차라는 사회학적 기생충이 당면 현안이지만 북한은 생물학적 기생충 해결이 더 시급한 셈이다. 문제는 기생충만이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16년 북한의 결핵 환자가 13만 명으로 전년보다 20% 늘었으며, 사망자(1만1000명)는 전년의 배를 넘었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결핵과 말라리아, B형 간염 등 감염성 질환으로 숨진 사람이 전체 사망자의 31%나 된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 정부는 그동안 이와 달리 에이즈로부터는 자유롭다고 자신해왔다. 세계 에이즈의날이었던 지난해 12월 1일, WHO 관계자를 초청해 평양에서 ‘에이즈 청정국’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호언장담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국제학술지 ‘사이언스’가 지난 24일 미국과 북한 공동연구진의 논문을 근거로 “2018년 북한에서 에이즈 양성으로 판명된 환자가 8362명”이라고 밝힌 것이다. 혈액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거나 오염된 주사기를 쓰는 일이 잦은 게 주요 감염 원인이라고 한다.
이런데도 북한 정부가 허위 발표를 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인권 후진국이란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됐다. 그렇지만 북한의 보건·위생 문제는 비핵화와 관계 없이 인권 차원에서 접근하는 게 옳다. 비핵화의 궁극적 목적 또한 인간다운 삶이다. 인권이 신장되어야만 비핵화의 명분과 동력이 뚜렷해지고 강해질 수 있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