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목선인지 어선인지가 삼척항에 무단 입항해 청와대와 국정원, 국방부에 초비상이 걸리고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던 지난 20일. 청와대 한편에서는 조용한 오찬행사가 열렸다.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가 친(親)여성, 친(親)가족 정책을 명분으로 대기업이 포함된 10여 개 기업의 CEO급 인사들을 청와대로 불러 오찬을 함께했다. 비공개적으로 ‘조용하게’ 추진된 오찬이었지만 일부 언론보도로 알려지자 청와대가 뒤늦게 이를 공개했다.
청와대는 부대변인 서면브리핑으로 김 여사가 ‘다양한 가족을 포용하기 위한 사회공헌기업 초청 오찬’을 가졌다면서 “사회적 가치 제고와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기업을 초청해 격려하고, 사회공헌이 더욱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준비됐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김 여사가 “기업의 사회공헌이 더욱 확산되었으면 한다”는 말로 기업의 사회공헌의 의미를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오찬에는 조용병 신한금융그룹 회장, 윤부근 삼성전자 부회장, 이형희 SK수펙스추구협의회 SV위원장, 오성엽 롯데지주 커뮤니케이션실장과 KB국민은행, 샘표, 한샘 등 10여 개 기업 CEO급 고위 임원이 참석했다. 문재인 대통령조차 대기업 관계자들과의 비공개 만남을 자제해왔다. 구속수감 중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재임기간 동안 기업인들을 불렀다가 ‘묵시적 청탁’ 시비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점도 고려됐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마당에 김 여사가 이례적으로 CEO급 인사들과의 비공개 오찬을 주재했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이런저런 말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대통령 부인이 경제를 움직이는 기업 관계자들을 별도로 만났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역대 정권에서 볼 수 없었던 이례적인 오찬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반대세력에게는 더없이 좋은 공격소재가 될 수밖에 없다.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이날 오찬에서는 김 여사가 앞선 북유럽 국빈방문 때 남성 육아휴직자들과의 간담회 등에 대한 소회를 피력하고, 20세 이하 월드컵 축구팀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전언이다. 분(分) 단위로 일정을 쪼개서 사용하는 대기업 최고위급 임원들을 불러놓고 할 만한 주제였느냐는 네티즌들의 지적이 쏟아졌다. 또 불과 일주일 전에 약속을 잡았다고 하는데, CEO급 기업인들을 그렇게 갑자기 불러들일 일이었는지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내용적으로도 그렇다. 김 여사는 사회공헌의 의미를 강조하고, “더욱 확산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어땠을까. 청와대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대기업 입장에서, ‘영부인’이 청와대로 초청해서 격려차 하는 말이라고 과연 액면 그대로 ‘편하게’ 들을 수 있었을까. 부르니까 가기는 했지만 오찬 내내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미뤄 짐작된다.
김 여사는 이전에도 ‘광폭 행보’로 구설에 휘말린 적이 있다. 잦은 해외순방 동행을 둘러싼 쑤군거림은 ‘흠집내기’를 위한 것이라 치더라도, 지난해 11월 인도 방문 당시에는 대통령 전용기인 공군2호기를 이용했는가 하면, 대통령이 동행하지도 않았는데 대통령 휘장을 그대로 달고 갔다가 야당의 지적을 받기도 했다. 얼마 전 5·18 기념식 때는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의 ‘악수 패싱’ 논란도 벌어졌다. 지난해 2월에는 청와대 출신 지방선거 출마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격려했다가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위임받지 않은 권력행위’라는 지적을 자초했다.
국회는 유례없는 파행이 계속되고 있는가 하면 경제위기설은 끊이지 않고, 미중 경제전쟁을 비롯한 나라 안팎의 사정이 좋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 나선다’는 평가를 받아왔는데, 이럴 때는 조용한 내조를 해야 하지 않을까. 문재인 대통령에게 더 소통을 주문하고, 대기업이 아니라 야당 지도자들의 부인들을 초청해 담소를 나눴다면 청와대도 자신있게 공개할 수 있지 않았을까.
더 한심한 것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의원들이다. 민주당 생활적폐청산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범계 의원은 “두고 보자니 기가 찬다. 사회공헌기업의 CEO를 격려하고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은 누가 봐도 미담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격려했을 때 통하는 말이다. ‘우리편’끼리 볼 때는 그런 말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민주당이 야당이었어도 이런 주장을 했을까.
그러니 여당의 존재감이 사라지고 청와대만 쳐다보고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역대 어느 정당도 집권 3년 차가 되도록 이렇게나 청와대에 끌려다니지 않았다. 적어도 소장파 의원들이라도 나서서 ‘오너’에게 문제를 제기했었다. 그 결과 당이 건강해지고,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체력을 갖추게 되고, 집권당도 되고 했던 것이다. 이래저래 아쉬움 투성이다.
서울본부장·서울정치부장 thrk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