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욜로(YOLO:You Only Live Once)족이 가장 선호하는 묘비명이란다. ‘소확행(小確幸)’은 이들 삶의 모토고, 삶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라는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축제로 해석한다. ‘노력의 배신’을 일찌감치 경험해서인지 삶의 엄숙함을 신봉하지 않는다. 얼른 실천에 옮기지 못할 뿐, 공감은 된다. 하지만 내세울 만한 소확행은 없지만, 주어진 소명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 사람도 많다. 이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 조용히 자기 일에 매진한다. 대다수 과학자도 이 범주에 속한다.

요즘 세상에서 ‘돈이 되지 않는’ 기초과학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정부가 세금을 써서 지원하는 것이 맞다. 돈이 된다면 기업들이 투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초과학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이길래 선진국들은 천문학적 금액을 쏟아붓는 것일까? 인간은 ‘돈’ 외에 다양한 가치를 추구한다. 그 가치가 다수의 인정을 얻지 못한 활동이면 우리는 그것을 ‘덕질’이라 부른다. 자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이 덕후들에게는 가치가 된다. 기초과학도 어찌 보면 ‘덕질’에 가깝다. 많은 과학자는 최초의 순간과 호기심을 자양분 삼아 연구에 매진한다. 더 나은 사회와 미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과학을 한다고 말한다면, 그 고귀한 정신은 높이 사지만 하드코어 과학 덕후들은 웃을 것이다. 선진국들이 더 나은 기초과학력을 과시하는 이유는 결국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국격은 그러한 ‘아름다움’에서 나오는 것 같다. 한국에도 훌륭한 과학 덕후들이 많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연구만큼은 수준급으로 해내는 과학계의 ‘김연아’들이다. 전용링크나 정상급 코치도 없이 엄마가 따라다니면서 최고가 된 피겨 여제 김연아처럼 말이다. 처음에는 그냥 좋아서 시작한 그녀의 덕질이 우리에게 인류 최고의 아름다움과 그로 인한 자긍심을 선물해 주었다.

그간 기초과학은 표나지 않게 자신의 역할을 담당했다. 국가는 옛날 말로는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하고, ‘창조경제’를 선도하며, 요즘 말로는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는 일을 과학자들에게 맡겼다. 명석한 두뇌와 성실한 태도를 갖춘 과학자를 대표 선수 삼아 국제 대회에 출전시키는 것처럼 과학을 운영했다. 이런 과학을 상징하는 말이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였다. 과학자들은 기꺼이 부름을 받아 밤낮 없이 연구했다. 이러한 목표 지향적 과학은 (한국인이라면) 누가 해도 상관없었다. 아무나 해도 상관없다는 말이 누구든지 존중받는다는 뜻은 아니다. 국가주도의 과학은 경력 단절이 두려운 여성 과학자나 불안정한 처지에 놓인 청년 과학자의 사정을 꼼꼼히 챙길 수 없었다. 과학은 국가가 그 결과를 거두어가면 끝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자연의 탐구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다. 경제효과를 유일한 가치로 삼지 않고, 정치적 판단에 흔들리지 않으며 과학을 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과학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다양한 조건을 존중하고 그들의 과학과 삶이 모두 풍성해지도록 애씀으로써, 미래를 열어가는 과학이 되어야 한다.

과학 덕후들은 저력이 있다. 오랫동안 실험실 안팎에서 유용하든 무용하든, 온갖 존재를 찾아내고 그 성질을 탐구해 왔다. 중성자, 그래핀, 줄기세포 같은 존재들이 그렇게 과학적 ‘사실’이 되었다. 그들은 수많은 현상을 감지하고, 이해하고, 만들어냄으로써 과학의 존재 의의를 증명해 왔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이런 덕후들이 진가를 발휘하고 우리에게 아름다움의 순간을 선사할 수 있도록 조금 더 시간을 주고 그들의 삶을 인정해 줘야 한다. 일부 과학자의 비도덕성과 이기심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다수 과학 덕후는 오늘도 자발적으로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실’을 만들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고 있다. 사실 나 역시도 딸아이의 아이돌 덕질을 묵인하고, 지켜보자고 결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 부녀는 모두 자신만의 덕질에 열중하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인정하지 못했었다. 남을 믿고 기다려 주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부산대 생명과학과 교수